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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삶에 대한 진지한 은유인 줄 알았건만…

치열한 생존경쟁인 삶에 대한 알레고리를 포기한 채 단순 복수극으로 끝나버린 조민호 감독의 <1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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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8-05 15:01 수정 : 2009-08-06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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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선정적인 제목이다. “10억 만들기”에서 “10억을 받았습니다”까지, 삶의 불안정성에 시달리며 자기노동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10억’이란,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고 천천히 인생을 새로 구상해볼 수 있는’ 선망의 액수다. 영화는 ‘10억’을 걸고 8명의 경쟁자들이 서오스트레일리아의 자연을 배경으로 벌이는 야생 서바이벌 게임을 담는다.

영화

‘10억 상금’에 모여든 이들의 목숨 건 대결

시작과 함께 참가자들의 선정 통지를 받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이들은 뛸 듯이 기뻐한다. 언감생심, 10억원에 근접할 기회를 얻게 된 것 만으로도 가슴이 부푼다. 그러나 현지에 도착하자 이상한 낌새를 느낀다. 수많은 신청자를 불러모은 인터넷 방송국치고 너무 조악하다. 하지만 상금으로 제시된 10억원(100만달러)의 실체를 확인하자 의심은 곧 잦아든다.

평범한 종목의 게임이 시작되고 승패가 갈리지만, 낙오자는 뜻밖의 방식으로 선정된다. 참가자들은 술렁이지만 모두 경계할 만한 인물이 제거된 데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다음 게임 역시 종목은 평범하나 상당한 윤리적 시험이 내장돼 있다. 이들은 곧 알아차린다. 낙오자는 실제로 죽는다는 것을. 참가자는 게임을 벗어나고자 하지만, 그들이 벗어나려는 저항 과정까지도 서바이벌 게임의 일부가 되어, 인터넷 방송에 중계되고 시청자의 댓글을 낚는다. 그들은 게임을 거부하고 싶어도 계속할 수밖에 없다. 비단 10억원에 현혹되어서가 아니라, 게임을 받아들이든 안 받아들이든 극한의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 펼치는 온갖 노력들이 ‘서바이벌’ 게임을 통해 관철되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읽히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사람들은 ‘서바이벌 게임’의 룰에 동의했든 하지 않았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 발버둥이 경쟁이 되고, 체제의 법칙이 되며, 체제를 긍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로부터 벗어나려는 저항은 자본주의 룰에 따라 낙오가 되고 죽음을 맞지만, 더 끔찍하게는 그것까지도 자본주의 체제로 흡수되어 상품화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꽤 흥미로운 알레고리를 포기하고 복수극임을 밝혀나갈 때, 다층적 의미는 사라진다. 대신 (알레고리를 표방했다면 대수롭지 않았을) 헐거운 개연성들이 엄청난 공백으로 두드러진다. 게임을 거듭할수록 참가자의 행로를 모두 예측하는 게 가능한가 하는 의문이 눈덩이처럼 커진다. 더욱이 대단한 듯 숨겨놓았다가 말미에 밝히는 원인사건이 복수극의 과정과 별 상관이 없기에 느껴지는 허탈감은 ‘용두사미’의 인장을 새기기에 충분하다.

복수극이라면 왜 굳이 서바이벌 방식을?

원인사건과 그에 연루된 인물들이 그저 우연이었던 데 반해, 복수극은 지나치게 치밀하고 특별하다.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고 단지 비겁했을 뿐인 인물들에게, 왜 하필이면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특수한 방식으로 복수해야 했는지 영화는 설명하지 않는다.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의 비겁함이 더 드러나거나 반성되는 것도 아니고, 그 과정을 완수해 한 명의 생존자에게 10억원을 안겨야만 하는 필연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서바이벌과 복수극이 한 배에 타야 했던 걸까? 진정한 미스 혹은 미스터리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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