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저작집 1~30〉
권력과 체제에 대한 날선 비판을 담았던 20권짜리 전집 발간은 군사독재 종식 이후 이른바 ‘87년 체제’의 본격 시작을 알리는 사건일 수 있었다. 20여년 뒤 권력이 다시 87년 체제 이전으로의 회귀를 노골화한 시절에 이뤄지는 30권짜리 저작집 발간은 참으로 공교롭다. 박태순씨도 그걸 의식했으리라. <씨알의 소리> 창간 2년 뒤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그 잡지는 폐간과 복간을 오갔으며 주인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도 ‘미네르바’와 ‘촛불’ 들이 숱하게 잡혀갔다. 그 몇년 전인 1968년 <사상계> 5월호에서 함석헌은 “5·16은 혁명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고 외친다. 그는 5·16 쿠데타를 한마디로 “강간”이라고 했다. 1958년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 뒤 광대무변으로 발전해가는 함석헌 사상의 동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글이다. 그 글에서 그는 “6·25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소련이)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며 “우리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왜 분단당했나? 그것은 우리가 일본 식민지배를 당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우리가 “꼬부린 새우”, 곧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왜 약소민족이 됐나?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은 나라 바깥 이리·호랑이들한테 꼬리치며 퍼주기를 일삼으면서 제 나라 백성을 “사정없이 악착스럽고 더럽게 짜먹었”던 양반 등 사대주의 “정치업자놈들” 때문이었다. “잘못은 애당초 전주 이씨(이성계)에서 시작됐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 그리고 나당연합과 고구려 멸망까지 간다. “나는 6, 7년 이래 중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 안에 광영 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가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이었다. … 드디어 나는 자기 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 ‘영휘 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일제 때인 1934년 <성서조선>에 실린 이 글은 그의 고뇌의 원형을 보여준다. 민족혼을 고취시킬 ‘영광의 역사’를 가르치기엔 조선역사는 너무 보잘것없고 고통스러웠다. 나중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 그리고 다시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거듭나는 그의 대표저서를 특징짓는 ‘고난의 역사’관은 거기서 출발했다. 저작집 30권은 함석헌 사상이 그가 타계할 때까지 어떻게 태동하고 변해갔는지, 그 다이너미즘을 날것 그대로, 훨씬 더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한겨레> 2009년 4월4일치에 실렸던 글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