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꿈꾸는 미래는 삶을 속인다

322
등록 : 2000-08-15 00:00 수정 :

크게 작게

지워지지 않는 변방의 그늘진 얼굴… 끝없이 내일을 기약해야 하는 사람들

세계의 모든 거대도시들이 그렇듯 서울 역시 수백, 수천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쾌락과 분노, 연민과 슬픔 등 인간의 희로애락은 바로 도시 어딘가의 한구석에서 집단적으로 피어나 도시의 얼굴을 구성한다. 명암에 따라 그 얼굴의 스펙트럼을 정열해 본다면 아마도 양 끝에는 강남 압구정동과 구로 가리봉동이 놓일 것이다. 압구정동이 자기현시욕을 주체하지 못하는 서울의 탐욕스런 얼굴이라면 가리봉동은 잊고 싶은 과거처럼 그늘지고 비루한, 서울의 또다른 얼굴이다. 두 공간은 한국사회의 천민자본주의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이란성 쌍둥이의 얼굴같기도 하다.

공간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으로 인해 이 두 지역만큼 서울을 배경으로 하는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 곳도 없다. 시인 유하가 양귀자의 소설 <비오는 날엔 가리봉동에 가야한다>의 제목을 따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를 써내려간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예술작품에서 묘사하는 가리봉동을 추체험하는 것은 압구정동보다 고통스럽다. 단순히 묘사되는 외견의 남루함 때문이 아니다. 상승과 하강, 부러움와 환멸이 역동적으로 혼재하는 압구정동이 달콤쌉싸름한 맛을 주는 반면 상처와 좌절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가리봉동은 지독한 씁쓸함만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신경숙의 자전적 소설인 <외딴 방>이 기억하는 가리봉동 동신전기주식회사에서의 소녀 시절이나 영화 <박하사탕>에서 엉망이 된 가리봉동우회의 야유회 장면은 실로 원치 않는 놀이기구에 동승하는 불편함을 전한다.

내몰린 사람들의 거처, 심야만화방


(사진/영화의 배경이 된 가리봉동 만화가게 주인과 세월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김홍준감독)
시대의 엄혹함이 마지막 몸부림을 치던 87년 가리봉동을 그리고 있는 <장미빛 인생>(1994)도 결코 팝콘을 우적우적 씹으며 달콤하게 즐길 수 있는 영화가 아니긴 마찬가지다. 천원짜리 한장에 하룻밤을 해결할 수 있는 심야만화방에 모이는 인물들은 모두 쫓기지 않으면 내몰린 사람들이다. 위장취업이 발각되어 피신하고 있는 운동권 대학생 기영,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쓰고 도망다니는 건달 동팔(최재성), 장난스레 썼던 무협지가 이적표현물로 낙인찍혀 수배중인 작가 지망생 유진. 이들은 쫓기는 신세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손님들, 밤새 야한 비디오 앞에서 밤을 새우는 가출 소년, 화투와 소주로 시간을 죽이는 일용노동자들은 집에서 내몰린 사람들이다. 이들은 아침이면 부스스한 얼굴로 하루를 살기 위해 나갔다가 밤이면 좁고 더러운 소파 한쪽을 내집 삼아 엄지만화방으로 찾아든다. 동네 양아치들과 악다구니치며 ‘엄지만화방’을 지키는 신필순(최명길)은 “무식하고 야비하고 추잡스런” 이들로 가득한 이곳에 몸서리를 친다. 과거는 드러나지 않지만 열아홉살 때 가출한 뒤 흘러흘러 이곳까지 왔을 그녀에게 가리봉동은 선택이 아닌 운명과도 같은 곳이다. 벌집들 사이 비좁고 냄새나는 골목을 지나면서 “난 이 동네만 오면 편안하고 좋은데”라며 감상적인 말을 하는 동생 기영이야말로 이 고단한 동네의 이방인이다. 영화가 시작될 무렵 호헌조처를 발표하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의 육성이 흘러나온다. 6월항쟁 직전 인간의 생체시계마저 정치권력에 의해 조작될 수 있음을 입증했던 섬머타임 시작을 알리는 라디오 중계는 영화의 대단원을 알린다. 뜨겁게 일렁이던 이 두달 사이의 가리봉동은 기실 영화의 주인공이자 김홍준 감독(43)이 보여주고 싶었던 모든 것이다.

“가리봉동에는 유난히 만화가게가 많았어요. 그곳의 만화가게는 적당히 주변이면서도 사실은 80년대의 치열한 현장입니다. 그때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가리봉동’이 갖는 역사적 울림을 잊지 못할 겁니다.”

가리봉동 일대는 1963년 정부의 수출산업 육성방안의 일환으로 ‘구로공단’이 조성되면서 70년대 이후 노동자들의 소비와 문화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80년대 이곳은 치열한 노동운동의 현장이자 상경한 노동자들의 유일한 놀이공간이기도 했다. 가리봉 오거리에는 경찰의 살벌한 감시를 아슬아슬하게 피한 불법 유인물이 뿌려졌고, 주말 저녁 때면 노동에 지친 육신을 달래려는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허름한 선술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이들이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북적이던 가리봉 오거리와 가리봉 시장 일대는 80년대 후반부터 찬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수출 절대 의존국이었던 미국과 일본이 장기불황을 겪고 인건비가 상승함에 따라 구로공단의 많은 사업장이 파산하거나 안산, 시화 등 경기도 일대로 이동하면서 노동자들의 이주행렬도 이어졌다. 노동자들이 기거하던 두평, 세평짜리 쪽방들은 90년대 초반 가출한 10대들의 집성촌으로 변모한다.

“가리봉동이란 동네 참 묘한 동네 같아요. 시간이 정지된 느낌이랄까. 영화를 찍던 94년도에 87년 당시의 의상이나 소품 따위를 구하기 위해 청계천을 뒤지고 다녔는데 결국 다 이 동네에 남아 있더군요. 동네의 경관도 노래방과 단란주점이 들어선 것 말고는 87년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80년대 이곳을 채우던 사람들만 사라졌지요.”

거리의 주인은 바뀌어도 표정은 여전

(사진/구로4동 벌집들은 이제 몇채 남지 않았다.얼마 있으면 이 집들도 재개발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하나의 드라마, 하나의 이야기가 끝난다 해도 현실은 여전히 지속된다’는 말은 가리봉동에 여전히 유효하다. 우선 한 시간에도 수십번씩 가리봉동의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소음이 그렇다.

“동시녹음이라 비행기 소리 때문에 애 많이 먹었어요. 촬영 후반기에는 소리만 들어도 스태프들이 화물기다, 747기다 척척 알아맞힐 정도였으니까요. 제게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처럼 가리봉동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만화가게나 쪽방보다 더 강렬한 가리봉동의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시나리오에는 없었지만 결국 비행기는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두 장면에 등장한다. 가리봉 시장의 새벽거리에 서서 커피를 마시는 동팔의 머리 위에 서 있는 동시상영관의 초라한 간판 위로 비행기가 날아가는 장면과 동팔이 죽고 난 뒤 게딱지 같은 가리봉동의 벌집들을 조망하는 옥상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는 장면이 그것이다.

가리봉동에 남은 건 비행기 소리만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던 가리봉 시장통 지하의 만화방이 포스터만 갈아 입은 채 서 있고 미스 오가 커피를 나르던 다방도 여전하다. 거리 곳곳에서 조악한 간판을 단 동시상영관은 이제 심야만화방 대신 갈 곳없는 이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영화에서 내부는 세트였지만 ‘만화나라’로 이름을 바꾼 만화방의 내부도 <장미빛 인생>에 등장하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화방에는 영화에서 본 듯한 그 얼굴들이 만화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거나 더러는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이제 가리봉동도 폐동이 다 되었어요. 번성할 때는 방, 부엌, 방, 부엌만 빼곡하게 지은 벌집들도 방이 모자라 난리였는데, 이제는 무너뜨린 시장 건물터에도 나서서 지으려는 사람이 없어요. 용역회사가 많다보니 싸움질도 많고, 2년 전부터는 조선족 동포들이 가리봉 시장에 제일 많이 다닙니다.” 11년째 만화가게를 운영하며 촬영 당시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던 주인 장병남(71)씨의 말이다.

공장 노동자에서 가출 청소년들로, 그리고 이제 연변 출신의 조선족 노동자들로 가리봉동 거리의 주인은 변하고 있다. 가리봉 시장에 부쩍 늘어난 중국식당에서는 자장면이 아닌 ‘동북식’ 보신탕과 개고기 볶음이 메뉴에 등장하며 식료품점들은 서울에서 구하기 힘든 중국식품들을 판다. 노래방들은 노동에 지치고 향수병에 신음하는 동포들을 위해 중국 노래를 레퍼토리로 올리고 있다. 하나의 이야기, 한 시대가 마감을 해도 천형처럼 이 땅의 주변인들을 빨아들이는 가리봉동의 현실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 완강하게 변경으로 남아 있는 가리봉동에 비해 영화의 또다른 촬영지였던 구로3, 4동 지역은 이미 빠른 변화를 겪고 있다. 구로지역 안에서도 최빈층에 속하던 이 지역에는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이 들어섰고 촬영 당시 가득했던 벌집들 자리에는 말쑥한 빌라들이 들어섰다. 동네 아래쪽으로 한참 올라가고 있는 고층아파트 공사장의 요란한 굉음은 변방에서 중심으로의 진입을 위한 격전장처럼 느껴진다. 처절하면서도 쓸쓸하다.

이삿짐 싸는 풍경, 다시 변경을 향해

이런 변화의 한가운데서 불과 20여채의 벌집만이 남아 있다. “집집마다 어찌나 많은지 촬영만 시작하면 구름처럼 몰려들던” 아이들도 그 좁은 골목을 뛰어다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무덤인지 방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집기들에 먼지가 더께처럼 쌓이고 유물처럼 때묻은 주인의 옷이 벽마다 걸려 있는, 중풍 걸린 독거노인의 방이 사라져가는 구로4동 벌집의 오늘을 보여줄 뿐이다. 벌집의 탄생과 죽음을 함께한 낡은 가로등에 붙어 있는 이사짐센터와 열쇠 제작 스티커는 이사가 유달리 많은 이 지역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후-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이 작은 공동주거지역은 얼마 전 바로 위에 들어선 남구로역으로 인해 더 불안해 보인다. 얼마 못 가 이 지역 주민들은 다시 한번 가로등 스티커의 전화번호를 적으며 이사짐을 싸야 할 것 같다. 그들은 또다른 도시의 변경에서 이사짐을 풀 것이다.

동팔의 어깨에는 빨간 장미 문신이 새겨 있었다. 고2 때 학교에서 잘리고 가출하면서 이 문신을 새길 때 그는 ‘언젠가 내게도 이 장미처럼 잘 나가는 세월이 오겠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동팔의 어깨에 새겨진 ‘장밋빛 인생’은 엄지만화방의 벽에 걸려 있던 ‘하면 된다’는 현판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언젠가, 언젠가는 가리봉동에도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거다. 이 미래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오늘도 가리봉동 벌집의 식구들은 부지런히 이사짐을 싼다.

김은형 기자dmsgud@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