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투명하고 깨지기 쉬운 사랑
등록 : 2000-08-15 00:00 수정 :
최근 한국사회의 관심사가 된 몸을 화두로 삼은 영화. <죽이는 이야기>에 이은 여균동 감독의 신작. 장르영화의 모색이 굵직한 흐름이 되어버린 요즘 한국영화 가운데 이 영화는 분명 주목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경계가 모호해진 사랑과 성의 문제를 <미인>은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먼저 필요한 것은 남자와 여자. 남자는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이 있지만 대부분 집에서 생활하는 남자는 필요에 따라 자신을 찾아오는 여자에게 아낌없는 애정을 베푼다. 그의 사랑은 한폭의 수채화 같은 아름다운 정사이기도 하고 그녀의 옷가지를 빨래하고 다림질하는 자발적인 노동이기도 하다. 그가 들려주는 사랑의 상념은 이 영화가 그의 관점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대상인 여자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정신의 깊숙한 영역을 장악해버린 옛 남자의 기억을 지울 수 없는 그에게 현재의 남자는 함께 살을 나누고 휴식을 얻는 장소에 불과하다. 여자는 모든 것을 제공할 의사가 있는 남자를 받아들이면서도 분명한 경계를 긋는다. 그녀에게는 남자의 목소리보다 누군가에게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가 더 큰 관심사다. 현대적인 생활과 도덕률을 지키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들은 정해진 관계의 틀을 가능한 유지하고 싶어한다. 이것은 진부하고 재미없는 관계일까?
그렇지 않다. 조연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남자의 집을 중심으로 진행된다는 단순함은 오히려 초점을 부각시키는 힘이 된다. 통일된 색감과 배우들의 연기도 깔끔하고 자연스럽다. 그들의 섹스장면이 상당한 강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끈기를 가지고 영화는 그들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 관계에서 섹스는 중요하다. 주인공들은 이름을 부르지 않으며 언어로 불가능한 이야기를 몸을 통해 대화한다. 관계의 기복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섹스장면에는 어떤 추함이 없고, 흰색과 살색의 조합이나 신체가 만들어내는 곡선은 아름답다. 그들의 섹스는 찰나적이지만, 감성과 몸의 현재성이 만들어내는 어떤 순수한 상태를 관객에게 제시한다. 투명해 보일 정도로 선명하고 끝이 보이기에 아련한.
따지고보면 그들의 관계란 유리 그릇처럼 불안정하여 영원히 지속될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감정의 흐름에 따라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며 결과를 요구한다. 여행을 떠나 해변에 도착한 그들은 언제나 환한 태양 아래에 있지만 그들의 웃음은 기울어가며 남은 빛을 내뿜는 석양과도 같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선택은 별로 없다. 누군가를 너무나 사랑하면 그 끝에 남는 것은 뭘까?
여행이 끝났을 때 영화는 다시 첫 장면으로 돌아온다. 여전히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모든 것이 꿈이었을까? 하지만 이것이 현실인지 남자의 상상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이란 상태의 지속인 동시에 온갖 억측과 상상의 조합이 아니던가? 주인공 남자가 가진 강렬한 방향성과 열정은 사랑의 매력이자 자신의 존재가치일 터이다. 제목 그대로 <미인>은 아름다운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에 대한 극히 개인적인 영화지만, 몸에 대한 사색과 일회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현대적인 삶에 대해 되돌아볼 장소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기대 이상으로 선전한 감독, 촬영감독, 연기자들의 모습이 영화의 멋을 더했다.
권용민/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