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간판에 헤딩∼
등록 : 2009-04-15 17:00 수정 : 2009-04-16 21:34
담배 간판에 헤딩∼. 사진 〈한겨레21〉윤운식 기자
최근 <한겨레21>에서 유난히 서울 용산 지역과 관련한 기사를 많이 다뤘다. 용산 참사를 계기로 도심 재개발과 관련한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났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나는 마음 한켠이 먹먹해지곤 한다. 용산 하면 떠오르는 가슴 아프고 황당했던 추억 때문이다.
때는 바야으로 2003년 여름 어느 날. <한겨레> 편집부에 근무하고 있던 나는 퇴근길에 익숙한 술동무들이었던 I(전 <한겨레> 문화부 기자·영화계 관계자), L(만화잡지 <팝툰> 관계자), K(<한겨레> ‘ESC’ 관계자) 등과 함께 용산구 동부이촌동 어느 일본식 선술집을 찾았다. 아파트 지하상가에 테이블 대여섯 개가 전부인, 흡사 분식집 같은 가게였다. 하지만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그 술집은 나름의 독특한 분위기가 있었다.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어느덧 고동색 대두병에 한가득 담겨 있던 사케가 바닥을 보였다. 아쉬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누군가 “비도 오는데 그냥 집에 가기는 좀 그렇잖냐”고 말했고, L의 오피스텔에서 2차를 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 순간 갑자기 평소 나답지 않은(!) 착한 마음이 발동했다. ‘막내라고 언제나 얻어먹기만 했는데, 오늘 2차에 필요한 와인이나 맥주는 내가 사야겠다!’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다. K의 우산을 함께 받쳐쓰고 있던 나는 머리에 손을 올려 들이치는 빗줄기를 가리며 편의점 앞 차양 밑으로 몇 발짝을 뛰었다. 차양 밑으로 뛰어 들어가며 손을 내리는 순간, 왼쪽 이마 관자놀이 근처에 뭔가 스쳐지나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대자, 축축한 뭔가가 만져졌다. 피였다.
‘투두둑 툭툭… 투두둑 툭툭….’ 팔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낙숫물처럼 땅바닥을 때렸다. 황당한 마음에 고개를 들어 정면 왼쪽을 바라봤다. ‘담배’라는 두 글자가 선명했다. 그랬다. 비 때문에 시선을 바닥에 둔 채 뛰어오다가 담배 간판 귀퉁이에 헤딩을 한 것이었다. 순식간 일어난 사고에 일행들이 모두 놀란 표정으로 내 주변에 몰려들었다. “괜찮냐”는 안부를 앞다퉈 묻는 그들의 표정엔 묘한 웃음이 겹쳐 있었다. 만화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을 두 눈으로 봤으니, 어찌 아니 그러겠는가.
그 와중에 L이 119 전화를 걸었지만, I가 나서 “시간이 없겠다”며 택시를 잡아탔다. 피범벅이 된 채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 들어서자 간호사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침대에 안내했다. 침대에 눕느라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던 손을 잠깐 뗐는데, 그 순간 피가 솟구쳐 침대 옆 벽에 빨간 포물선을 그렸다. 간호사는 있는 힘껏 두 손으로 상처를 누르며 다른 간호사에게 당직 의사를 급히 데려오라고 얘기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L이 입을 열었다. “순혁, 생각보단 괜찮네.” 병원에 왔으니 이제 큰일은 없지 않겠냐는 위안성 멘트였다. 그런데 상처를 누르고 있던 간호사가 한심한 표정을 지으며 L을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괜찮긴요. 동맥이 끊겼는데.”
띵~. 황당함 그 자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다니, 꿈만 같았다. 하기야 동맥이 끊기지 않고서야 피가 낙숫물처럼 떨어지고, 피가 튀어 포물선을 그렸겠는가….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