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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행복하세요, 영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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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4-13 14:51 수정 : 2009-04-16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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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드라마를 볼 때마다 지겹게 들은 대사가 있다. 바로 “그깟 사랑이 밥 먹여주냐?” 사랑에 목숨 건 주인공들이 울고불고 하는 드라마일수록 그들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말했다. 나이가 들어보니 그 말은 정답이었다. 서른까지 연애를 못해본 건 제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지만, 서른까지 백수라면 부모를 잘 만나지 않는 한 그야말로 생존이 위협받는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을 위해 목숨 걸고, 재산 걸고, 직장까지 거는 주인공들을 보면 ‘저것들은 먹고살 걱정도 안 되나’라는 생각부터 든다. 당장 다음달 월세는, 적금은, 카드값은 어쩌려고 저래?

tvN 〈막돼먹은 영애씨〉. tvN 제공

tvN <막돼먹은 영애씨> 시리즈는 밥 따위 먹여주지 않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먹고사는 것 자체가 팍팍해서 죽을 지경인 우리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린 드라마다. 직원 수 10명도 채 안 되는 조그만 광고회사의 디자이너 이영애(김현숙)와 그 주위 사람들의 일상을 다룬 이 작품은 2007년 첫 방송을 한 뒤 얼마 전 다섯 번째 시즌을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물게 성공적인 시즌 드라마로 자리잡았다. 영애씨가 서른에서 서른둘이 되는 동안, 모처럼 해봤던 사내연애는 무참하게 끝났고 무리해서 사들였던 연립주택 값은 폭락한데다 회사가 인수합병 되면서 졸지에 계약직으로 내려앉았다. 모친에게서 “니년 인생이 막장 드라마야!”라고 구박받는 인생도 가슴이 섬??할 정도로 현실적인데, 취업에 실패하고 도피성 유학을 떠나는 동생, 빚만 남기고 집을 나가버리는 직장 동료 부인 등 다른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 역시 내 주위에서 한 번쯤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다.

이렇게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보기 드문 드라마다 보니, 나 혼자 겪기도 구질구질한 이 현실을 굳이 TV로까지 보며 낄낄대게 된다. 기러기 아빠 유 팀장(유형관)은 상사로부터 “네가 아직도 사장인 줄 알아?”라는 폭언과 욕설을 들으면서도 꾹 눌러 참는다. 아부 따위 안 하고 당당하게 살겠다던 영애씨 역시 정직원 될 기회를 준다는 말에 이사의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가서 교통안전지도 봉사활동을 벌인다. 그리고 길가 슈퍼마켓에서 맥주 한 캔을 마신 뒤 다시 밥벌이를 위해 사무실로 돌아간다. 그 뒤로 깔리는 “어쩌면 당당해지기보다는 비굴해지는 데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라는 내레이션은 한국방송 <꽃보다 남자>에서 금잔디(구혜선)가 틈만 나면 “대한민국 서민은 오기랑 끈기 없으면 시체야!”라고 부르짖던 장면들보다 훨씬 깊은 인상을 남긴다.

최근 <막돼먹은 영애씨> 시즌5 중 4회가 케이블 TV 프로그램으로서는 기록적인 2.5%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희망 없는 세상, 운명적인 사랑도 거저 생기는 행복도 바라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오늘을 살고 있는 이들이 보낸 응원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니 영애씨가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있기를, 그리고 나도 그녀도 언젠가는 좀더 행복해지기를.

최지은 <텐아시아> 기자·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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