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추사학파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추사와 그 학파’전
서예에 문외한인 이도 서예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추사체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다양한 서체의 장점을 골라 스스로 창안한 것이 추사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하지만 추사는 꼭 서예가만은 아니었다. 국보 180호 <세한도>를 남긴 화가로 난초를 잘 치기로도 당대 최고였고, 그림과 글씨스승으로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최고의 미술교육자였다. 추사와 간송을 잇는 묘한 인연의 끈 이 추사의 서예 작품과 그림을 일반인들이 볼 기회는 사실 다른 대가들에 비해 훨씬 드문 편이다. 그런데 모처럼 추사의 작품, 그리고 추사의 영향으로 생겨났던 조선 후기 추사학파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5월27일까지 서울 간송미술관(02-762-0442)에서 열리는 ‘추사와 그 학파’전은 이름만 들어봤던 추사체 진품들과 추사의 영향으로 성립된 추사학파의 주요작 120점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리다.
추사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없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추사의 작품이 일부의 개인소장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간송미술관과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우리 문화재를 사재를 털어 모은 간송 전형필이 중점적으로 수집했던 것이 추사를 비롯한 추사학파의 작품들과 그 이전 세대인 겸재 정선을 비롯한 진경풍속화풍 시대의 작품들이었다. 조선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흐름의 주요작들은 간송의 혜안과 노력으로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만이 할 수 있는 전시회인 셈이다. 또한 이 전시는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간송미술관의 개관 30주년 기념전이라는 점에서도 뜻이 깊다. 간송 전형필이 추사의 작품을 모은 데에는 추사와 간송을 잇는 묘한 인연의 끈이 있었다. 갑부였던 간송이 미술품을 수집할 때 도와준 이는 당대 최고의 미학자이자 감식안이었던 위창 오세창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으로 서예가이자 미술학자였던 위창의 조언을 들어가며 간송은 추사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이 오세창의 아버지가 바로 역매 오경석으로 추사의 제자였다. 추사의 감식안이 오세창을 통해 이어졌던 것이다. 추사는 우리 역사 속 천재 가운데서도 단연 첫손 꼽히는 걸출한 천재였다. 정치인, 학자, 그리고 문인인 것은 당시 사대부라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지만 글씨와 그림에, 그리고 금석학이란 새로운 학문까지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점에서 추사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그래서 19세기 문화계는 모든 분야에서 추사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추사보다도 16살이나 연상이었던 신위나 추사의 절친한 동무였던 권돈인, 그리고 김유근을 비롯해 조희룡, 김수철, 전기 등의 제자들이 모두 추사의 영향을 받은 추사학파의 일원들이다. 4대에 걸친 화가집안의 시조인 소치 허유도 그의 애제자였고,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흥선대원군을 몰아낸 정적이었던 민씨 일가의 민규호도 모두 추사의 제자였다. 추사는 이처럼 명문귀족 제자도 많았지만, 본인 스스로 중인 서얼이었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듯이 조희룡, 이상적, 방희용, 허유, 전기 등 출신계급이 한미하더라도 재주가 있으면 꺼리지 않고 제자로 삼았다. 추사의 진면목은 ‘도전정신’
추사는 실학자인 박제가의 제자로 일찍부터 천재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동지부사로 베이징을 방문하는 아버지를 따라간 스물네살 때 이미 박제가로부터 추사의 이름을 들었던 당시 청나라 학예계의 거물 옹방강과 완원 청나라 학자들이 “조선의 천재가 온다”며 기다렸을 정도였다. 추사는 이들과 교유하며 고증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고 돌아왔다.
청조의 고증학은 송명이학이 지나치게 철학적이 돼버려 현실성이 떨어졌고, 그래서 결국 오랑캐 취급을 했던 만주족에 나라를 빼앗긴 사실에 반발해 일어난 학문경향이었다. 철저한 사실확인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실사구시’ 학풍이 특징이다. 그래서 금석문을 고찰하는 것이 필수로 떠올랐고, 여기서 금석고증만을 전문으로 하는 학문경향인 금석학이 파생했다. 추사는 이 금석학에 매진하며 비문 서체를 연구했고 옛글씨의 장점을 모아 추사체를 만들었다.
추사의 예술은 글씨와 그림 모두 극도로 절제된 추상적 회화미가 특징이다. 장식과 멋을 배제하며 형태의 핵심과 본질만을 압축해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 청나라의 문인들이 도전하던 이상적 경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청조 문인들은 자신들이 이루지 못한 경지를 개척한 추사체에 감탄해 추사에게 글씨를 보내달라고 앞다퉈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예술가로서의 추사의 진면목은 바로 이런 도전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림에서는 당시 주류였던 진경풍속화풍 대신 정제된 문인화를 주창했고, 서예에서는 왕희지를 본받아 정립된 동국진체를 부정하며 추사체를 열었다. 비록 청조 고증학풍에 지나치게 경도돼 우리 고유의 것을 무시한 모화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새로운 흐름을 이끈 선구자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는 것이다.
이번 전시는 추사의 작품들 못잖게 추사의 영향이 어떻게 동지들과 제자들의 작품 속에서 드러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전시보는 재미가 될 것이다. 애초 동국진체를 하다가 추사의 영향을 받으며 추사학파로 변신한 조광진의 작품은 거의 추사의 작품과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비슷하며, 추사에게는 단금의 벗이었던 권돈인의 글씨도 추사체의 영향을 보여준다. 추사의 제자로 추사에게 “그림에 문기(文氣)가 부족하다”는 꾸지람을 듣긴 했지만 당대 최고의 매화 전문 화가로 꼽히는 조희룡의 그림 속 글씨 역시 추사체 그대로다.
당시 기교를 최대한 억제한 작품으로 주목받았고 추사가 호평했던 북산 김수철과 추사가 가장 아꼈던 제자인 고람 전기의 작품도 이번 전시회에서 꼭 눈여겨볼 것들이랄 수 있다. 특히 전기는 추사가 자기보다 뛰어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청출어람’에서 따온 호 ‘고람’을 지어줬지만 서른살에 요절해 추사의 가슴이 미어지게 했던 제자였다. <석림산정> 등 마른 먹의 진하지 않은 붓질이 마치 추사의 <세한도>의 갈묵을 연상케 한다. 이 밖에 추사가 “압록강 이동에서는 이와 같은 작품이 없을 것”이라고 칭찬했던 흥선대원군의 묵란과 추사의 말년을 보살폈던 소치 허유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들이다.
요즘의 세련된 미술관들처럼 멋지지는 않아도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는 고풍어린 간송미술관에서 초여름 신록의 정취를 즐기며 조상들의 글과 그림에 서린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券氣)를 느껴보면 어떨까.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 사진/ 추사의 영향을 받은 조광진의 서예작품. 얼핏봐서는 추사체와 구별가지 않을 정도다. |
![]() 사진/ 추사 김정희의 <침계>. 힘이 넘치면서도 추상적인 조형미가 돋보이는 걸작이다. |
서예에 문외한인 이도 서예라고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것이 추사체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다양한 서체의 장점을 골라 스스로 창안한 것이 추사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바다. 하지만 추사는 꼭 서예가만은 아니었다. 국보 180호 <세한도>를 남긴 화가로 난초를 잘 치기로도 당대 최고였고, 그림과 글씨스승으로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최고의 미술교육자였다. 추사와 간송을 잇는 묘한 인연의 끈 이 추사의 서예 작품과 그림을 일반인들이 볼 기회는 사실 다른 대가들에 비해 훨씬 드문 편이다. 그런데 모처럼 추사의 작품, 그리고 추사의 영향으로 생겨났던 조선 후기 추사학파의 작품들을 한꺼번에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5월27일까지 서울 간송미술관(02-762-0442)에서 열리는 ‘추사와 그 학파’전은 이름만 들어봤던 추사체 진품들과 추사의 영향으로 성립된 추사학파의 주요작 120점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리다.
추사의 작품을 쉽게 볼 수 없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추사의 작품이 일부의 개인소장가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간송미술관과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우리 문화재를 사재를 털어 모은 간송 전형필이 중점적으로 수집했던 것이 추사를 비롯한 추사학파의 작품들과 그 이전 세대인 겸재 정선을 비롯한 진경풍속화풍 시대의 작품들이었다. 조선 회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 두 가지 흐름의 주요작들은 간송의 혜안과 노력으로 지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래서 이번 전시는 간송미술관만이 할 수 있는 전시회인 셈이다. 또한 이 전시는 한국미술사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긴 간송미술관의 개관 30주년 기념전이라는 점에서도 뜻이 깊다. 간송 전형필이 추사의 작품을 모은 데에는 추사와 간송을 잇는 묘한 인연의 끈이 있었다. 갑부였던 간송이 미술품을 수집할 때 도와준 이는 당대 최고의 미학자이자 감식안이었던 위창 오세창이었다.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으로 서예가이자 미술학자였던 위창의 조언을 들어가며 간송은 추사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사들였다. 이 오세창의 아버지가 바로 역매 오경석으로 추사의 제자였다. 추사의 감식안이 오세창을 통해 이어졌던 것이다. 추사는 우리 역사 속 천재 가운데서도 단연 첫손 꼽히는 걸출한 천재였다. 정치인, 학자, 그리고 문인인 것은 당시 사대부라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지만 글씨와 그림에, 그리고 금석학이란 새로운 학문까지 모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점에서 추사는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그래서 19세기 문화계는 모든 분야에서 추사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추사보다도 16살이나 연상이었던 신위나 추사의 절친한 동무였던 권돈인, 그리고 김유근을 비롯해 조희룡, 김수철, 전기 등의 제자들이 모두 추사의 영향을 받은 추사학파의 일원들이다. 4대에 걸친 화가집안의 시조인 소치 허유도 그의 애제자였고,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흥선대원군을 몰아낸 정적이었던 민씨 일가의 민규호도 모두 추사의 제자였다. 추사는 이처럼 명문귀족 제자도 많았지만, 본인 스스로 중인 서얼이었던 박제가를 스승으로 모셨듯이 조희룡, 이상적, 방희용, 허유, 전기 등 출신계급이 한미하더라도 재주가 있으면 꺼리지 않고 제자로 삼았다. 추사의 진면목은 ‘도전정신’

사진/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방추이란>.(위)김수철의 <송계한담>. 담백하면서도 새로운 화풍으로 독창적 회화세계를 일궜던 김수철의 대표작이다.(오른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