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슈이치
-독자가 많이 궁금해하는 점이 여성의 심리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 하는 것이다. 남녀를 그릴 때 차이는 없나. 알 수 없는 여자의 마음도 있지 않나. =남자와 여자는 엄연히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 구분 방법이 조금 더 세밀하다. 알지 못하는 남자 A가 있고 알 것 같은 여자 B가 있을 때 나는 B에 대해 쓴다. 여성 전체는 못 쓰지만 B는 쓸 수 있다. 소설 중 필요한 캐릭터가 있을 때는 잘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남성 심리와 여성 심리를 구분하지 않고 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동경만경> <파크 라이프> <7월24일 거리> 등 장소가 제목에 들어간 경우가 많다. <악인>도 고속도로에서 시작하고, <사요나라 사요나라>도 마을의 묘사에서 시작한다. 당신에겐 장소가 특별한 것 같다. =소설을 쓸 때 제일 먼저 장소를 결정한다. 장소를 선택하는 기준은 특별히 없다. 그런데 장소에 갔을 때 스토리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장소를 하나의 등장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써나가는 편이다. 그래서 다른 작가에 비해 장소의 비중이 높다고 여겨지지 않나 싶다. 이영미씨가 번역상을 받은 <악인>은 <아사히신문> 연재작으로 이전과 달라진 작풍을 선보였다. 그전 작품이 오후 툇마루에 앉아 발을 씻는 식이라면, <악인>은 아침 출근 시간에 쫓겨 머리를 감는 것 같은 긴박감을 자아내는 본격 스릴러물이다. 큰 사건이 눈앞에 있으니 애써 작은 일들이 사건을 만들어낼 필요도 없고, 끔찍한 일이 저질러졌으니 선과 악이라는 선명한 대립점도 부각돼야 한다. -초기작이 연애·남녀 관계를 다뤘다면 후기로 오면서 스릴러물이 많아졌다. 무슨 계기가 있었나. =초기 작품에서 인간의 광기를 많이 그렸다. 다른 점이라면 <악인> 전에는 등장인물이 광기를 컨트롤할 수 있는 마지막 상황까지 그렸다면, 그 이후에는 광기를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까지 그려나가게 되었다.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이어져나갔다고 할 수 있다. 10년간 써온 것을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악인>에서 범죄를 테마로 다루게 됐다. <악인>의 후기에는 이런 말이 인용돼 있다. “이전에는 일보 직전까지 묘사하는 일이 많았다. 이번 작품에서는 브레이크를 풀고 쓰고 싶었다.” 초기의 <최후의 아들> <퍼레이드>, 후기의 <악인> <사요나라 사요나라>가 범죄물을 다루고 있다. 등장인물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에서도 변화가 느껴진다. 이전 작품이 인간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거리가 있다고 했다면, 후기 작품에서는 인간관계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아닐까. 포용력이 커지고 상대방의 약점을 받아들이게 된다든지 하는.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사회에 대한 포용력이 좀더 넓어진다거나 하는 점은 없는 것 같다. 인간 자체가 모순적인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단지 예전에는 자신 있게 모순 자체를 인정했다면, 지금은 인간의 모순에 대해 사회성을 좀더 인정하게 됐다는 점이 달라졌다고 할까. 덧붙이자면, 사람들은 자칫 나 자신만은 모순되지 않는다라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적어도 나는 그런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악인>의 경우, <아사히신문>에 연재를 해야 했기에 대중적으로 써야 했던 건 아닌가. 표현법이나 인물 묘사에서 예전보다 알아보기 쉬워진 느낌이다. =아무래도 의식을 했다. 단어를 쓰거나 할 때 디테일을 의식했다기보다는 매일 아침 쓴 것이 다음날 피드백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문예지에 쓸 때와는 매우 다른 경험이었다. <아사히신문>을 펼치면 매일 일어나는 현실이 위에 실리고, 그 아래 <악인>이 실렸다. 현실에선 살인사건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그 사건을 다루는 바로 그 기사 밑에 <악인>이 있다.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악인>은 일본적인 이야기로 보인다. 비슷한 주제를 일본 소설가들이 많이 다룬다. 비슷한 시기에, 히가시노 게이고도 <악의>를 냈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이 나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일본에서는 그런 경향을 좋아한다. 행복하기만 한 가정을 작품에서 다루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나. 파란만장한 스토리를 쓰면 덜 지겹고 재밌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보다는 ‘악’을 다루는 걸 좀더 좋아한다.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자면, 일본인은 대외적인 생활이 평화롭게 지나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하다. 적어도 소설이나 픽션 세계에서는 강한 작품의 맛을 보고 싶어한다. -흥미롭게도 ‘악’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이 <최후의 아들>에도 나온다. “사랑받고자 하는 것은 구제받을 길 없는 악의다.” <악인>에서도 사랑받으려는 욕망과 ‘용서’라는 문제가 갈등한다. ‘악’에 대한 해석을 듣고 싶다. =이건 분명 악인데도 선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행동들은 품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소설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최후의 아들>에서 쓴 ‘악의’도 명백한 악의라는 맥락에서 쓴 거다. 자신은 사랑을 주지 않으면서 사랑을 받으려 한다면 악의라고 할 수 있다. 인터뷰가 끝난 뒤 그는 창덕궁으로 간다 했다. 도시를 방문할 때마다 공원을 둘러본다고 한다. 바람이 많이 불고 저녁에는 비가 날렸다. 공원에서 그는 어떤 작은 것을 발견했을까? 글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