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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꼬마와 여성의 몸으로 독일을 읽다

전쟁 세대와 전후 1세대의 사랑을 그린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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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9-03-25 11:48 수정 : 2009-03-27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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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Kid), 연인들 사이엔 ‘부적절한’ 호칭이다. 부적절한 호칭엔 부적절한 관계가 전제돼 있다. 36살의 한나(케이트 윈즐릿)는 15살 소년 마이클(데이비드 크로스)를 “꼬마”라고 부른다. 꼬마는 한나에게 책을 읽어준다. 그리고 그들은 사랑을 나눈다. 한나의 눈은 떨리지만, 한나의 손은 망설이지 않는다. 한나는 사유하는 대신에 행동하는 인간이다. 사랑을 나누고, 이별을 고하고, 유산을 남기는 일을 그는 혼자서 결정하고 행동한다.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는 한나와 마이클의 사랑이자 독일의 전쟁 세대와 전후 1세대의 이야기다.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8년 만에 법정에서 만난 연인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마이클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한나는 문득 그를 떠난다. 그리고 8년이 흘러서 법대생이 된 마이클은 법정에서 피고인으로 앉은 한나를 본다. 나치 수용소의 감시원으로 일했던 한나는 그러나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나치 감시원은 단지 ‘일’이었을 뿐이다. 그는 생계를 해결하는 일에 성실했을 뿐이다. 기계적 성실함, 한나는 죄를 추궁하는 판사에게 되묻는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겠는가?” 새 수감자를 수용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감시원 한나는 오랜 수감자를 골랐을 뿐이다. 그렇게 선별된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음의 가스실로 간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말이다. <더 리더>는 그렇게 전범국가 독일의 죄의식을 둘러싼 복잡한 질문을 선악을 넘어선 방식으로 던진다. 가엾게도 한나에겐 자신이 하지 않은 일조차 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비밀이 있다.

어른이 돼서도 마이클(랄프 파인스)의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어린 그가 읽어주었던 <오디세이>처럼 한나는 그에게 머나먼 길을 지나서 결국은 돌아갈 첫사랑이다. 마이클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무기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힌 한나에게 책을 읽은 테이프를 보내줄 때, 때로 한 생을 휘어잡는 사랑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마이클은 한나의 연인인 동시에 보편적 인간이다. 그는 한나의 수치심을 아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한나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못하는 시민이다. 그런 마이클의 추궁에 한나는 답한다. “내가 어떻게 느끼거나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죽은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일 뿐이야.” 하지만 한나의 진심은 언제나 언어 너머에 있었다.


홀로코스트 옹호 vs 성숙한 시선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더 리더>에는 논란의 꼬리도 붙어다닌다. 홀로코스트를 옹호했다는 비판도 있고, 미성년과의 정사신에 대한 논란도 제기됐다. 한편에선 나치 시대에 대한 성숙한 시선이란 평가도 받는다. <더 리더>의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자신이 발 딛고 선 곳과 불화하는 인물들을 그려왔다. 그의 데뷔작 <빌리 엘리어트>는 남성성이 압도하는 탄광촌에서 발레리노를 꿈꾸는 소년의 이야기였고, 전작인 <디 아워스>는 시대에 짓눌린 여성의 역사를 그렸다. 그의 세 번째 작품인 <더 리더>에도 빌리 같은 소년이 나오고, 무언가를 속으로 삭여야 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디 아워스>로 니콜 키드먼에게 2003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겼던 달드리 감독은 <더 리더>로 케이트 윈즐릿에게 2009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선물했다. 3월26일 개봉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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