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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책이 책에게 연애편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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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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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풍성한 서양문화사가 곁들여진 이광주 교수의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

사진/ 1458년 만들어진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아름다운 세밀화를 일일이 손으로 그려넣었다.
“책에는 모든 과거의 영혼이 가로누워 있다.” 토머스 칼라일의 말이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을 통해 책에 대한 헌사를 남긴 이들은 이루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책을 일컬어 ‘영혼의 치유장’이라고 했다. 로마의 철인 키케로는 “책은 소년의 음식이 되고, 노년을 즐겁게 하며 번영과 장식과 위난의 도피소가 되며, 집에 있어서는 쾌락의 종자가 되며 밖에 있어서도 방해물이 되지 않고 여행할 때에는 야간의 반려가 된다”고 상찬했다. “책에 대한 즐거움은 인도의 부와도 바꿀 수 없다”던 영국 역사가 기번의 말도 빼놓을 수 없다.

최고로 즐거운 놀이, 책방순례

그러나 꼭 이런 칭찬의 말들만이 책에 바쳐진 것은 아니었다. 풍자시를 잘 썼던 아일랜드 시인 토머스 무어는 “책이 유익한 것이었다면 세계는 훨씬 전에 개혁돼 있었을 것”이라고 비꼬았고, 릴케는 <말테의 수기>에서 “책이란 것은 원래 공허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영국의 정치인인 디즈레일리는 심지어 “책은 인간의 저주”라고까지 했다. “현존하는 책의 90%는 시원찮은 것이며, 좋은 책은 그 시원찮음을 논파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내려진 최대의 불행은 인쇄의 발명이다.”


책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은 아마도 모든 책이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책에는 양서와 악서가 있게 마련이고, 때로는 악서가 양서보다 더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탓이기에 책에 대한 예찬만큼 책에 대한 비판도 따랐다. 그러나 비판 역시 책의 중요성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기에, 책이 가치있다는 명제 자체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이란 인류 지혜의 보고이고, 천재의 유산이며, 누가 뭐래도 ‘마음의 양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아주 작은 휴대용 책들. 우표보다 작은 것도 보인다. 애서가나 장서광들의 호기심과 탐욕이 낳은 기이한 책들이다.
책은 모든 문화의 산물이다. 동서양의 책에는 동서양 문화의 정수가 담겨 있다. 책의 역사가 곧 문명의 역사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사회적 중요성을 떠나 책은 무엇보다도 읽는 이들에게 지극히 개인적인 재미와 감동을 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과 사랑에 빠진다. 책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책은 인생의 동반자에 다름 아니다. 인제대 명예교수인 이광주 교수에게도 책은 단순히 책이 아니라 ‘인생의 벗’이다. 스스로 책방 순례가 인생 최고의 ‘즐거운 놀이’라고 일컫을 정도다. 평생 책을 읽고 모아온 이 노교수가 최근 ‘책에 대한 책’을 펴냈다. 출판잡지 두곳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아름다운 지상의 책 한권>(한길아트 펴냄/ 1만7천원/ 문의 02-515-4811)은 책에 대한 온갖 풍성한 이야기를 담은 인문교양서인 동시에 책을 사랑하는 한 학자가 책에 바치는 신앙고백과도 같은 수필집이다.

<아름다운…>은 한마디로 책을 통해 보는 서양문화사다. 유럽 중세시대, 한자 한자 손으로 써서 만들었던 사본에서 출발해 20세기 초까지 이르는 서양 책의 역사와 책문화 그리고 책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들을 종횡무진 펼치는 책이다. 부담없이 읽어내려가며 다채로운 자료 그림을 좀더 보면 서양사의 흐름을 책이라는 주제어로 일람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무엇보다도 학술적이거나 어렵지 않고 옛날이야기를 하듯 편안하게 이어지기 때문에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책이란 한 시대의 문화적 총체이며, 아름다운 책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점을 역설한다.

귀족과 성직자만 소유했던 귀중품

사진/ 중세의 책은 도난을 막기 위해 쇠사슬로 묶어서 보관했다.(왼쪽)19세기 책의 명장 윌리엄 모리스의 걸작 <제프리 초서 저작집>의 한 페이지(오른쪽)
이 책은 책 역사의 전반을 넘나들며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책의 제목처럼 ‘아름다운 책’에 대한 부분이다. 대량생산시대인 요즘에는 더이상 만들 수도 없고 찾아보기도 힘든 옛날의 책들이 얼마나 수고롭고 힘든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를 설명해주는 대목은 이 책에서 가장 재미난 부분이다. 중세 유럽의 책은 종이 대신 ‘벨럼’이라는 송아지 가죽에 장인들이 세밀화를 손으로 그려 만든 것이어서 귀족이나 성직자가 아니면 쉽게 만들 수 없는 엄청난 귀중품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귀족들이 저마다 자기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호화 장정본을 만들었고, 이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투입했다. 장정에는 보석을 박기도 했고, 가문의 문양과 아름다운 그림을 집어넣어 책이 아닌 예술품이랄 수 있는 책들이 이 시기의 책이었다. 이런 전통은 20세기 초까지 이어졌고, 그래서 유럽에서는 행여 책을 훔쳐가지 못하게 책에 쇠사슬을 달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이런 아름다운 책의 대명사로 꼽고 있는 책은 모두 네 가지. 14세기 프랑스의 베리 공이 만든 <호화시도서>, 고딕체 인쇄본의 백미로 꼽히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 19세기 최고의 책 제작 장인인 윌리엄 모리스의 <제프리 초서 저작집>, 그리고 <샤갈의 그림 성서>다. 이 가운데 특히 윌리엄 모리스는 그동안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책 장인으로 유명한 인물인데 지은이는 마지막 현대 호화미장본의 거장인 이 모리스에 대해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 독일 라이헤나우 섬에 있는 수도원에서 10세기 말에 만든 오토 3세의 복음서. 보석과 상아판으로 호화롭게 장식했다.
이 밖에 전쟁중에도 사서에게 신간을 보내라고 독촉했던 나폴레옹의 일화며, 애인의 유언에 따라 애인의 피부로 자기 저서를 장정한 천문학자 프랑마리옹의 이야기, 희귀본 수집에 목을 매는 마니아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시바의 여왕의 도서관 발굴에 나선 이야기 등의 에피소드들과 지은이가 직접 방문한 유럽 고서점 문화, 직접 책을 수집하러 다닌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구수한 이야기와 함께 곁들여진 풍성한 삽화와 사진들도 책읽는 맛을 더해주는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책이 그야말로 쏟아져 나오는 지금, 우리는 옛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책을 적게 읽고 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반성이 절로 따라나온다. 다른 나라에서 나온 신간을 책상에 앉아 인터넷으로 주문할 수 있고, 전자책에 오디오북까지 나와 있지만 책에 대한 사회전반의 관심은 점점 식어가는 것이 아닐까. 보르텔이 <철학사전> 서문에서 “아무리 유익한 책이라도 그 절반은 독자 자신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던 가르침은 그래서 지금의 독자들에게도 매섭게 다가온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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