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시작되는 드라마 가운데 뭐니뭐니 해도 가장 기다려지는 작품은 한국방송 <꽃보다 남자>다. 일본 만화가 가미오 요코의 동명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의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하면 ‘우연히 귀족 학교에 들어간 서민 가정의 소녀가 4명의 돈 많은 꽃미남들을 만나 좌충우돌하며 상류층의 배타적인 문화에도 기죽지 않고 온갖 음모와 방해 공작을 넘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이야기다.
신데렐라와 캔디를 적절히 조합한 듯한 설정은 사실 그리 특별할 것도 없지만 제1차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이루어지기도 한참 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 <꽃보다 남자>의 해적판 만화는 전국 여학교 교실을 휩쓸었다. 그리고 고등학생 주제에 부와 권력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네 꽃미남 ‘F4’의 매력에 넘어가 방학숙제도, 고입 연합고사 준비도 잊고 밤을 지새우는 여중생이었던 나는 어느새 서른이 다 되어 이 드라마의 제작발표회를 취재하러 갔다.
마카오며 뉴칼레도니아며, 이름조차 생소한 지역으로 해외 로케이션을 다녀왔을 만큼 <꽃보다 남자>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상위 1% 부자들의 라이프스타일이다. 주인공인 고등학생들이 승마와 골프는 물론 사교댄스를 추거나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것도 일상이다. 하필 대통령이 재래시장을 찾아가 배추를 사며 눈물지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불경기에 방영이 시작되다 보니 배우와 제작진들은 ‘럭셔리한 배경’보다는 ‘재미와 감동’을 눈여겨봐달라며 몹시 조심스러워했지만, 사실 화면에 등장하는 대저택이나 명품 의류보다 더 화려한 것은 이 작품에서 설정된 대한민국 상류층의 면면이다.
글로벌 규모의 대한민국 대표 재벌 ‘신화그룹’의 후계자 구준표(이민호), 전직 대통령의 손자 윤지후(김현중), 독립운동가의 자손이자 예술 명문가의 차남 소이정(김범), 신흥 부동산 재벌의 후계자 송우빈(김준). 이 아름답고 흠잡을 데 없는 ‘F4’의 배경은 그야말로 ‘만화적’이고 낯설다. 일단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재벌 후계자는 편법 상속과 탈세의 대표주자인데다, 전직 대통령 아들들은 ‘소통령’ 아니면 ‘낙하산’으로 불리며 줄줄이 감옥을 오갔고, 독립유공자 자손들은 광복 뒤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철저히 소외당해 설움과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는 게 현실이니 말이다. 그나마 극중에서 전통 있는 폭력 조직 ‘일심파’가 건설업에 뛰어든 뒤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지닌 신흥 재벌 ‘일심건설’로 성장했다는 설정이 정곡을 찌를 뿐이다.
그래서 상류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커녕 오로지 ‘강부자’만이 있는 이 나라에서 예나 지금이나 서민인 나는 이제 드라마를 보면서도 F4의 매력에 순수하게 빠져들지 못하고 그들이 앞으로 대학은 제 실력으로 갈지, 군대는 과연 제대로 갈지 따위를 마음 한구석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게 될 것 같다. 과거 <꽃보다 남자>의 해적판 제목이 ‘오렌지족’에서 나온 <오렌지 보이>였고, 15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이름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져 서글픈 것은 그 때문이다.
최지은 <10매거진> 기자·10-magazine.com
<꽃보다 남자> 한국방송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