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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브라질 축구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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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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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비 엇갈린 남미 2002월드컵 예선… 브라질 침체·에콰도르 도약 등 이변 속출

사진/ 고지대 국가의 반란. 볼리비아는 선두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무승부를 기록했다.(AP 연합)
모두 90경기 중 반환점을 이미 넘어서 3분의 2(60경기)를 소화한 남미의 2002월드컵축구대회 예선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개인기가 넘쳐나고, 정열적인 축구를 구사하는 남미는 지금 브라질의 침체와 고지대에 위치한 에콰도르의 도약으로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아직도 세계랭킹 1위를 지키고 있는 브라질이 내년 한·일월드컵에 출전할 가능성은 여전히 높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지만, 최근 보여준 경기력은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브라질 축구의 실상을 그대로 내보이고 있다. 브라질 축구 위상의 실추는 바로 에콰도르 원정경기의 패배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그뒤 브라질은 페루와 안방경기에서조차 비김으로써 체면을 구겼다.

축구의 명가, 종이호랑이로 전락


반면 한번도 월드컵 본선에 출전하지 못했던 에콰도르는 남미대륙 예선 중간순위에서 브라질을 제치고 3위로 뛰어올라, 내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 국민들이 흥분을 억제하지 못하고 있다. 역시 고지대의 나라인 볼리비아가 하위권에 처져 있으면서도 1위인 아르헨티나를 안방에서 혼쭐나게 만든 것도 특기할 만하다. 외신들은 하나같이 지난 4월27일 아르헨티나의 무승부를 “영웅적인 무승부”로 평가했지만, 실상 그럴 만한 이유는 경기를 벌였던 장소가 해발 3600m의 고지대였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아르헨티나가 패배 직전에 극적으로 동점골을 터뜨렸다는 것이다. 동점골은 종료 단 2분 전에 터져나왔다. 이번 월드컵 남미예선은 대서양 연안을 따라 해상도시 중심으로 발달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축구강국이 남미대륙의 지붕인 안데스산맥의 고지대에 위치한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에 고전하고 있다는 ‘이상기류’ 현상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4월27일 벌어진 남미예선에서는 최강으로 군림해온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모두 약체인 볼리비아와 페루에 비겼다. 지금까지 벌여온 12경기에서 6차례만 이긴 브라질은 1승이 너무도 아쉬웠다. 특히 에콰도르 원정 패배로 브라질은 국내외에서 망신을 당했는데, 이번엔 7위팀인 페루를 안방에서 불러들여놓고 비기고 만 것이다.

브라질은 여러 차례의 기회를 살리지 못해 전반전을 득점없이 끝냈다. 이제 남은 45분은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는 브라질 안방팬들에게 너무나 조급한 시간이었다. 브라질의 희망 호마리우가 전반을 오프사이드로 허비했다. 낙담하고 있던 그는 후반 20분 결국 선취골을 터뜨리며 체면을 살렸다. 그러나 브라질의 리드는 12분 만에 끝났다. 페루는 파후엘로의 패스를 받은 호제리오가 멋진 머리받기 슈팅골을 넣으면서 동점을 만들어냈다.

히바우두의 부진과 호나우두의 부상 결장으로 전력이 크게 약화된 브라질은 대표팀을 새로 추슬렀지만 역시 35살의 ‘늙은’ 호마리우에게만 매달리고 있는 안타까운 승부가 계속 연출되고 있다. 어쨌든 94미국월드컵의 스타 호마리우는 페루전 선취골로 남미예선에서 현재 8골로 득점 단독 선두를 달리고 있다.

브라질은 페루전에 앞서 열린 에콰도르 원정경기의 패배가 사실은 너무 뼈아팠다. 이 경기를 놓고 브라질의 언론은 물론 외신까지 “이젠 베네수엘라만 남았다”고 조롱했다. 베네수엘라는 지금 1승만 거둔 채 남미예선에 참가한 10개 나라 중 최하위를 달리고 있다. 그런 베네수엘라를 들고 나온 것은 월드컵에서 무려 4차례나 우승한 브라질이 에콰도르에 패함으로써 이젠 베네수엘라만 브라질을 이기면 남미의 모든 나라가 브라질을 상대로 1승씩은 챙기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베네수엘라는 남미에서 유일하게 축구보다 야구에 주력하는 나라’라는 점이다.

22차례 맞붙어 처음 승리 거둔 에콰도르

[%%IMAGE2%%] 에콰도르의 안방경기 승리는 이런 점에서 브라질로서는 치욕을, 에콰도르로서는 최대의 영광을 가르는 분수령이 되고 말았다. 에콰도르는 남미의 북서단 안데스산맥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 브라질과 경기를 벌였던 수도 키토는 해발 2850m에 위치한 고지대다. 이 정도의 높이에서 등산이나 트레킹을 해본 사람이라면 조금만 힘을 쓰거나 운동을 하면 숨이 가빠지고 기력이 약해지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브라질이 패한 것은 바로 이 고지대 탓이다. 브라질은 그동안 에콰도르와 경기를 벌여 무려 9-1, 9-2, 7-1로 이길 정도로 압도적인 우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경기가 열렸던 지난 3월29일은 상황이 역전되고 말았다.

고지대에 적응이 잘된 에콰도르는 전반전을 대등하게, 아니 좀더 우세하게 경기를 벌이더니 후반 시작 4분 만에 여세를 몰아 결승골을 넣어 1-0으로 이겼다. 결승골의 주인공은 멕시코 프로리그에서 활약중인 아구스틴 델가도로, 그는 이번 예선에서 이날 결승골에다 그뒤 파라과이에서 2골을 보태 지금은 7골로 아르헨티나의 골게터 에르난 크레스포와 함께 남미예선 득점 공동 2위를 달리고 있다. 이날 델가도는 기진맥진한 브라질의 수비를 3명이나 제치며 중앙돌파를 시도한 카비에도의 패스를 받아 벌칙구역 오른쪽에서 몸을 날리며 골을 터뜨렸다. 에콰도르는 지난해 브라질과의 예선 1차전에서 2-3으로 지긴 했지만 골을 넣으면서 자신감에 불탔고, 결국 세계 53위의 나라가 브라질과의 22차례 대결 끝에 역사적인 승리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에콰도르는 한달 뒤인 4월26일 남미예선 2위를 달리고 있는 파라과이마저 안방에서 2-1로 물리치며 연승행진을 이어갔다. 에콰도르는 이 경기에서 전반 20분 수비수 한명이 퇴장당해 수적 열세에 놓인데다, 주장 알렉스 아귀나게까지 부상으로 결장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파라과이의 카르도소에게 선취골을 내줘 패색이 짙어진 에콰도르는 역시 최고의 스트라이커 델가도가 전반 종료 직전 동점골을 터뜨리더니, 후반 8분 다시 머리받기 슈팅을 성공시키며 대역전극을 펼쳤다. 에콰도르는 이 승리로 7승1무4패(승점 22)가 됐고, 이날 페루와 비긴 브라질을 승점 1점차로 따돌리며 3위로 뛰어오르게 됐다. 파라과이 역시 에콰도르에 불과 1점 앞선 채 2위가 되고 말았다.

고지대 나라의 연승 행진은 언제까지

사진/ 파라과이와 베네수엘라의 경기모습.(AP 연합)
영어 ‘이퀘이터’(equator: 적도)와 비슷한 이름을 지닌 에콰도르는 적도 근방에 위치해 있으면서 고지대라는 지리적인 특성 탓에 이번 예선 안방에서만 지난해 3월부터 베네수엘라(2-0승), 6월 페루(2-1승), 7월 콜롬비아(0-0무), 8월 볼리비아(2-0승), 10월 칠레(1-0승), 올해 3월 브라질(1―0승), 4월 파라과이(2―1승)전까지 6승1무무패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이 경기 다음날인 4월27일 아르헨티나는 역시 고지대인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에서 패배 직전에 2골을 퍼부으며 극적인 무승부를 기록했다. 현재 예선 1위를 달리고 있는 아르헨티나는 무려 해발 3600m에서 벌인 볼리비아와의 원정에서 선취골을 터뜨렸지만 잇따라 3골을 내주며 패색이 짙었다. 그러나 스트라이커 에르난 크레스포가 후반 43분 추격골을 터뜨렸고, 로스타임 때 파블로 소린이 문전 혼전 중에 동점골을 엮어냈다. 볼리비아 역시 고지대 덕에 안방 2승4무 무패의 성적을 이어갔다.

이제 7월1일부터 다시 시작되는 남미예선은 브라질의 침체 탈출이냐, 고지대 나라의 연승행진이냐로 다시 관심을 모을 것으로 보인다. 브라질은 우루과이에 이어 아르헨티나, 그리고 고지대의 볼리비아와 경기를 남겨놓고 있어 힘겨운 일정이 예상된다. 반면 에콰도르는 페루, 볼리비아, 칠레 원정경기가 있지만 안방에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를 만나 아직도 월드컵 본선 진출에 도전해볼 만하다.

권오상 기자/ 한겨레 스포츠레저부 k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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