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 아직도 요원한 군사문화로부터의 해방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아마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무렵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5ㆍ17. 우리는 연이어 이틀을 군사쿠데타의 망령 속에서 보내야 한다. 5ㆍ16이 일어난 1961년부터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까지 우리는 장장 40여년을 군부독재 아래 살아왔다.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 지 거의 10년이 다 돼가지만, 과연 이 땅에서 군부독재의 잔재는 청산되었는가? 과연 군부독재와 징병제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돼온 군사문화는 사라져가고 있는가? 불행히도 답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군사독재의 잔재는 이 땅에서 대단히 안녕하시다. 아니, 잔재, 즉 찌꺼기가 아니라 몸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공동여당의 한축을 이루는 자민련의 실질적 소유자인 5ㆍ16의 핵심인물은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민주주의를 짓밟은 반란의 동료들과 함께 어디서 이 날을 자축하고 있을 것이다.
70년대, 수많은 장교들의 미국 유학
최근 <한겨레21>의 지면을 뜨겁게 달군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에서 3년여의 도피생활 끝에 마침내 검거된 박노항의 병역비리에 이르기까지 군대와 관련된 문제는 언제나 우리 사회의 중요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미완의 혁명이 돼버린 1960년의 4월민중항쟁과 이듬해의 군사쿠데타 이래 30여년간 한국현대정치사는 군부와 학생의 격돌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사회운동 세력이 파괴된 이남에서 학생들은 유일하게 조직된 잠재적 정치세력이었다. 지식인이 정치를 담당하는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학생들의 정치적 역할은 학생 자신들에 의해서나 사회에 의해서나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 학생운동이 급격히 퇴조한 것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 학생들이 점차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덜 갖게 된 것 등의 내외적 요인과 아울러, 그동안 학생들이 비정상적으로 대변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운동의 각 부문이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군부가 한국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제3세계 일반에서 군부독재의 출현이라는 일반적 현상과 아울러 분단과 전쟁, 그리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작용한 결과이다.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로 처음 출발할 때 6천명에 불과했던 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5만명,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8만여명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군은 25만명으로 증가했는데, 정작 지금과 같은 60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이다. 이런 방대한 군은 1950년대에는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1980년대 후반까지 30%가량을 할당받아 물질적으로 한국사회의 다른 어떤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렸다. 한국에서 군이 급성장하여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누렸던 것은 비단 무력을 장악하고, 무제한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이래의 상문천무(尙文賤武)라는 문인 우위의 전통을 지닌 유교문화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 또는 학생운동 세력은 군인들을 무식한 집단으로 얕잡아봤다. 1970년대 지식인들의 박정희에 대한 반감의 상당 부분도 그가 가난한 농민 출신의 군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1970년대 초반까지 장교집단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 중 하나였다.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해외유학인정 선발시험을 통과해 해외로 유학한 사람은 모두 7398명으로, 그중 86%인 6368명이 미국으로 유학했다. 그러나 이들 유학생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비율은 6%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한국군 장교는 1950년대에만 무려 9천여명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받고 돌아왔다. 물론 장교의 미국 연수기간이 일반 유학생들의 유학기간에 비해 짧았다고는 하지만, 군은 일반사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해외유학 경험자들을 보유했다. 또 사회에 재교육 기관이 거의 없던 시절 군은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보병학교, 공병학교, 통신학교 등등의 방대한 자체 교육기관을 갖춘 유일한 사회집단이었다. 군은 또 정밀한 무기를 다루고, 최첨단의 통신과 수송수단 장악했을 뿐 아니라, 방대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고도의 행정관리 체계와 기술을 보유했다. 한국사회에서 조직관리와 경영학의 개념을 가장 먼저 도입한 집단도 기업보다 군이었다. 한국군이 광복군을 계승했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군부가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미국과의 관계였다. 미국이 한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막대한 자금을 투여해가며 직접 육성한 기관은 군밖에 없다. 육군사관학교의 모태가 군사영어학교라는 사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수많은 장교들의 미국 유학은 한국군과 미국간의 심상치 않은 관계의 한 증거일 뿐이다. 특히 군은 처음에는 유엔군 사령부,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미연합사령부를 통해 주한미군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중진 국회의원들이 주한미대사관의 서기관급하고도 밥을 같이 먹지 못해 안달하던 것에 비하면, 고위장교 집단은 아주 안정적인 대미 접촉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군부는 미국문화 도입의 중요한 창구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문화의 유입에서 기지촌이 저급문화 유입의 통로였다면 군은 중급 내지는 고급문화 유입의 통로로 기능했다.
사관학교라는 특수한 교육경험을 공유하면서 선후배간의 관계로 얽혀 있는 군 장교들의 응집력은 한국사회에서 다른 집단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적으로 많은 교육을 받았고, 응집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무제한의 물자와 인력을 사용하고, 무장력을 갖추었으며, 게다가 미국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군이 한국에서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60만 대군의 위용을 자랑하는 한국군에는 몇 가지 감추고 싶은 기억, 또는 현실이 있다. 짧은 지면에서 다 논할 수는 없지만, 한국군의 뿌리가 일본군과 괴뢰 만주군이었다는 점, 한국전쟁 당시 일패도지하여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는 점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경찰과 함께 군이 친일 인맥이 고스란히 보존된 집단이라는 것이야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군의 친일인맥을 들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에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출신 등 확실한 친일경력자보다 당시 일반적으로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로 인식되던 학병 출신들을 많이 앉힌 것도 군의 친일 색채를 조금이나마 옅게 해보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1990년대 들어 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마치 한국군이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점이다. 전쟁기념사업회가 ‘군의 정통성’이라는 부제를 달아 펴낸 <현대사 속의 국군>이란 책이 그 한 예이다. 광복군 출신들 중 군에 투신한 사람이 상당수 되지만, 한국군에서 이들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밀린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광복군이 그토록 애타게 갈구하여 중국군으로부터 되찾은 작전지휘권을 한국군은 미군에게 맡긴 지 50년이 넘도록 찾을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군이 광복군의 맥을 계승하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연애편지’ 국방장관의 여유는…
한국군의 또다른 악몽은 한국전쟁 당시 일패도지하여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불패의 군대라던 미군도 한국전쟁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이북과 가장 어린 나라 중국을 상대로 승리하지 못한 채 전쟁을 끝맺었다. 이것이 베트남에서의 패배라는 더 큰 악몽에 묻힌 다음에도 두고두고 상처가 되어 미 군부의 이북에 대한 적개심의 원천이 되고 있듯이, 한국군에게도 한국전쟁 초기의 악몽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당시 만약 한국군을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빼갈 것이고, 미군이 철수하면 당장 이북이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한국군의 파병이 불가피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군사력은 물론이고 경제력에서조차 이북에 크게 뒤져 있던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수십년간 안보, 안보를 외치면서 국가예산을 물쓰듯 써놓고, 경제력에서 이북의 25배 규모에 이르렀다는 오늘까지도 주한미군이 없으면 당장 전쟁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린다 김 사건에서 단연 화제는 국방장관이던 양반이 린다 김에게 보낸 연애편지였다. 한 여자 정신과 의사는 마초사회 중 마초사회인 군에서 공군 출신이란 약점을 안고 합참의장에 이어 국방장관에 오른 이양호씨의 외로운 심리가 린다 김이라는 한국사회와는 다소 이질적인 여인에게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속마음을 토로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개인 심리분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국방장관이라는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집무실에서 연애편지를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을 수 있게 만든 원인은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정통관료’와 군사문화의 헤게모니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 계엄령하의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50여명의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많은 국회의원이 국제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상투적인 누명을 쓰고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이 사건으로 정국은 극한대치 상황에 빠졌다. 일치단결하여 전쟁을 수행해도 힘이 부칠 판에 어떻게 해서 이승만은 이런 폭거를 감행할 수 있었고, 야당은 또 이에 맞서 박터지게 싸울 수 있었을까? 그러고도 망하지 않은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다 미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직전 율곡 선생이 10만 양병론을 주장했을 때- 당시 인구규모로 본다면 오늘날의 60만 대군에 필적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왜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조공제(朝貢制)라는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믿고 기댈 곳이 있을 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는 형성될 수 없는 법이다. 쉰살이 넘은 대한민국 국군이 진정한 성년을 맞이하지 못하고, 군 수뇌부가 사춘기 소년 같은 연애편지를 외국 로비스트에게 보내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국의 로비스트는 주적이 아니니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미군의 그늘 아래 있는 한 대한민국 국군은 진짜 강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들뿐 아니라 군이 자각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군사문화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고, 군사독재정권은 물러났지만 아직도 그 잔재는 전혀 청산되지 않고 있다. 장차관이나 고위공무원의 인사가 있으면 신문에 프로필이 실리는데 거기 자주 등장하는 말에 ‘정통 관료’라는 것이 있다. ‘엘리트 관료’란 말은 이해가 가지만 관료면 관료지 ‘정통 관료’란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참 이상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도 한국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유신 말기에 장교의 공급과잉과 진급적체가 군 내부의 큰 불만으로 대두되자 박정희는 대위급에서 전역희망자를 받아서 행정부처의 사무관으로 임명했다. 이른바 군화 신고 고급공무원이 된 유신사무관이다. 당당히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 바로 ‘정통 관료’이다.
‘정통 관료’라는 말이 공무원사회에 국한된 말이라면, 한국사회 전반에서 군사문화의 막강한 헤게모니를 대변하는 말은 “너, 군대 갔다 왔어?” 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이다. 물론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도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장교를 놓고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군대는 출세를 위한 사다리였다. 가난한 농촌 청년이나 북에서 월남하여 남쪽에 이렇다할 기반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군대를 통해 신분의 상승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병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일제의 강점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대다수의 농촌 청년들은 문맹이었고, 전근대적인 인습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군대에 가면 우선 글을 배울 수 있고 자동차, 무기, 통신장비 등 기계문명을 비로소 접하게 된다. 단체생활을 통해서 규율과 협동, 복종을 배우고 졸병들을 거느리면서 나름대로 통솔력과 지도력, 사람 다루는 법을 익히게 된다. 또 1960년대 초반에는 제대 군인들에게 농사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 군대를 갔다 오면 사람이 달라져 오니 그런 말이 생길 법도 했다. 그러나 이는 196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이지, 대학교육이 일반화되어 고등학교 중퇴만 되어도 군대에 가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징병제,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
군대 갔다 오면 사람이 된다? 인격과 인권을 차압당한 채 군대생활을 하다가 제대하여 이를 되찾아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천만에 말씀이다. 사람구실을 못하는 자가 군대 가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군대에 가서 ‘군인’, 그것도 인격을 차압당한 졸병이 되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는 신성하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국방의 의무를 사병으로서 수행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군대생활이 신성했냐고? 이보다 더 썰렁한 개그는 없을 것이다. “너, 군대 갔다 왔어?”라고 물으며 군사문화를 확산하는 장교 출신들에게 반문해 보자. “당신, 사병생활 해봤냐?”고. 군대에서 가장 큰 욕이 “말뚝 박아라”이고, 제대하면서 군대생활한 동네를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현실에서 국방의 의무를 흔쾌히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민주사회의 표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중요한 하나는 국가나 정부가 국민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대한 훈육장으로서의 병영과 그 기반으로서의 징병제를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 대통령만 민간인 출신이 된다고 군부독재의 잔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새 시대에 맞는 군의 역할과 규모, 위상, 그리고 군사문화의 청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어찌 예비군 마치고 민방위가 되어서까지 아직도 가끔 군대 꿈을 꾸고 찝찝하게 일어나는 우리 세대만을 위한 것일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사진/ 대학교육이 일반화되어 고등학교 중퇴만 되어도 군대에 가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서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다.(이정용 기자)
미완의 혁명이 돼버린 1960년의 4월민중항쟁과 이듬해의 군사쿠데타 이래 30여년간 한국현대정치사는 군부와 학생의 격돌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사회운동 세력이 파괴된 이남에서 학생들은 유일하게 조직된 잠재적 정치세력이었다. 지식인이 정치를 담당하는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학생들의 정치적 역할은 학생 자신들에 의해서나 사회에 의해서나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 학생운동이 급격히 퇴조한 것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 학생들이 점차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덜 갖게 된 것 등의 내외적 요인과 아울러, 그동안 학생들이 비정상적으로 대변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운동의 각 부문이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군부가 한국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제3세계 일반에서 군부독재의 출현이라는 일반적 현상과 아울러 분단과 전쟁, 그리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작용한 결과이다.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로 처음 출발할 때 6천명에 불과했던 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5만명,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8만여명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군은 25만명으로 증가했는데, 정작 지금과 같은 60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이다. 이런 방대한 군은 1950년대에는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1980년대 후반까지 30%가량을 할당받아 물질적으로 한국사회의 다른 어떤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렸다. 한국에서 군이 급성장하여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누렸던 것은 비단 무력을 장악하고, 무제한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이래의 상문천무(尙文賤武)라는 문인 우위의 전통을 지닌 유교문화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 또는 학생운동 세력은 군인들을 무식한 집단으로 얕잡아봤다. 1970년대 지식인들의 박정희에 대한 반감의 상당 부분도 그가 가난한 농민 출신의 군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1970년대 초반까지 장교집단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 중 하나였다.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해외유학인정 선발시험을 통과해 해외로 유학한 사람은 모두 7398명으로, 그중 86%인 6368명이 미국으로 유학했다. 그러나 이들 유학생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비율은 6%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한국군 장교는 1950년대에만 무려 9천여명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받고 돌아왔다. 물론 장교의 미국 연수기간이 일반 유학생들의 유학기간에 비해 짧았다고는 하지만, 군은 일반사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해외유학 경험자들을 보유했다. 또 사회에 재교육 기관이 거의 없던 시절 군은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보병학교, 공병학교, 통신학교 등등의 방대한 자체 교육기관을 갖춘 유일한 사회집단이었다. 군은 또 정밀한 무기를 다루고, 최첨단의 통신과 수송수단 장악했을 뿐 아니라, 방대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고도의 행정관리 체계와 기술을 보유했다. 한국사회에서 조직관리와 경영학의 개념을 가장 먼저 도입한 집단도 기업보다 군이었다. 한국군이 광복군을 계승했다?

사진/ 한국전쟁 당시 일패도지하여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는 것은 한국군에 커다란 악몽이다. 그뒤 미국의 도움으로 서울을 탈환한 한국군이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대한민국정부 기록사진집)

사진/ 53년 8월 델레스 미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는 이승만 대통령. 미군의 그늘을 탈피하지 못하는 한 대한민국 국군은 진짜 강군이 될 수 없다.(대한민국정부 기록사진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