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필생의 화두는 바로 ‘혼종성’(hybrid)이다. 영화 <플라이>에서 파리의 몸과 인간의 몸이 분자적 결합을 하고, <크래쉬>에서 자동차와 인간의 리비도적 결합이 추구됐듯이, 그는 이질적인 것이 한 몸에 결합된 혼종성에 착목했다. 수많은 판타지 영화에서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이 등장하지만, 크로넨버그의 결합은 매우 독특하다. 가령 <플라이>의 ‘파리-인간’은 <스파이더맨>류의 ‘기능적 변신’이 아니고, 고대 ‘반인반수’ 괴물과도 다르다. 기능의 결합이 아닌 구조의 결합이며, 기관 단위가 아닌 분자 단위의 결합이 이루어져, ‘혼종-괴물’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의 근작들 <스파이더> <폭력의 역사> <이스턴 프라미스>는 혼종성과 무관하지 않느냐고?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혼종성은 더 깊숙이 침윤되어 있다.
기능적 변신 대신 구조적·미시적 변신
흔히 선과 악이 한 몸에 결합된 상태를 상상하라면, ‘두 얼굴의 사나이’, 즉 <헐크>의 변신이나, <다크 나이트>의 하비 덴트처럼 ‘반쪽은 미남, 반쪽은 해골’을 연상한다. 이는 ‘기능적 변신’ 모델과 고대 ‘반인반수’ 모델의 반복이다. 그러나 크로넨버그의 결합은 구조적이고 미시적이어서 그냥 한 사람의 몸속에 선인과 악인이 결합된 것으로 그린다. 혹시 다중인격이냐고? 그런 ‘쌩까는’ 장치도 불필요하다. 그저 선인이자 악인이다. ‘우리의 삶이 본래 그렇지 않은가? 그걸 못 받아들인다면 어린아이이거나 도착증 환자가 아닌가?’라고 묻는 영화가 바로 <스파이더>이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에 관한 무수한 담론들은 ‘어머니가 모성적 존재임과 동시에 이성애적 존재임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로 요약된다. <스파이더>의 소년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성적 존재인 착한 엄마를 이성애적 존재인 나쁜 엄마와 분리시키고 나쁜 엄마를 죽였다. 환상 속에서 창녀 계모를 죽였지만 현실 속에서 진짜 엄마를 죽인 소년은 미쳐버린다. 엄마 혹은 아빠가 ‘선이자 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폭력의 역사>가 말하는 것도 그것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더 진행시킨다. 14살 산모가 아기를 낳다 죽자, 조산사는 아기의 보호자를 찾기 위해 산모의 일기장에 적힌 러시안 식당을 찾았다가 마피아 조직을 접하게 된다. 그때 조직의 운전사가 그녀를 은밀히 돕고, 비밀경찰의 ‘언더커버’였던 그는 보스를 법정에 넘기고 조직을 장악한다. <폭력의 역사>가 선인들의 세계에 악인들이 찾아와 본래 악인이었던 주인공을 악의 세계로 초대했듯이, <이스턴 프라미스>는 악인들의 세계에 ‘백의의 천사’가 찾아와 본래 선인이었던 ‘타락천사’의 선의를 끌어낸다. <폭력의 역사>의 아빠가 강물에 피를 씻고 집으로 돌아갔듯이, <이스턴 프라미스>의 주인공 역시 악의 세계에 머문다. 그러나 <폭력의 역사>의 아빠가 곤혹함을 완전히 없애지 못하는 반면, <이스턴 프라미스>의 ‘타락천사’는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악의 세계의 수장이 된다. 그는 선의를 수행할 때도 범죄를 수행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체성의 고민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에겐 <무간도>의 량차오웨이(양조위)가 보이던 초조한 눈빛이 없으며, 오직 터미네이터가 연상되는 ‘포커페이스’로 일관한다. 그는 때로 선인이거나 악인, 혹은 악인의 외피를 쓴 선인 등이 아니라, 선인이면서 ‘동시에’ 악인, 즉 ‘선악-하이브리드’이다.
착한 세계, 그런 곳이 따로 있을까?
크로넨버그 감독에게 <개와 늑대의 시간>이 동원하는 기억상실이나 정체성 혼란의 호들갑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본래 ‘개는 곧 늑대’이기 때문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그 점을 명확히 한다. 첫 이발소 장면에서 성탄절 타령이나 한다며 조카를 나무라던 이발사가 면도칼을 건네자 조카는 손님의 목을 ‘썬다’. 조산사가 러시안 식당을 처음 찾았을 때, 보스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수프를 저으며 ‘아빠의 손맛’을 운운한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이 평온해 보이는 일상 가까이에 악의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주었듯이, <이스턴 프라미스> 역시 착한 사람들의 세계와 접해 있는 악의 세계를 보여준다. ‘타락천사’는 ‘토끼 굴에 발을 들여놓은 앨리스’에게 말한다. “저기 착한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그런데 그런 것이 따로 있기는 할까? (KGB를 운운하는 삼촌도 알고 보면 허풍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지독한 동성애 혐오를 드러내는 보스의 아들이 주인공에게 느끼는 감정은 동성애다. 그는 아버지가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질투하지 않으며, 주인공을 미끼로 쓴 아버지의 행위를 사과하고, 급기야 아버지 대신 주인공을 선택한다. 그가 ‘호모’가 아님을 증명하라며 주인공에게 여자와의 섹스를 강요했던 건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표면과 전혀 다른 이면이 하나의 존재 안에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이 감독의 세계관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핵심적인 또 하나의 화두는 바로 ‘몸’이다. <플라이>나 <크래쉬>에서 몸은 직접적인 변환을 거친다. 그 몸은 ‘옷’이라는 환상의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파리-인간’은 ‘스파이더맨’의 복장이 필요 없으며, <폭력의 역사>의 부부는 치어리더 복장이라는 환상의 장치를 걸쳤을 때보다 발각된 폭력성을 감추지 않았을 때 훨씬 강렬한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변신, 다중인격, 기억상실의 장치 역시 일종의 ‘옷 갈아입기’ 게임으로, 그의 세계에선 불필요하다. ‘알몸’으로 표상되는 실존주의가 그의 철학이다. ‘알몸’으로 표상되는 실존주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도 이는 ‘문신’과 ‘알몸 격투’를 통해 관철된다. 주인공이 조직의 멤버가 될 때, 그에겐 두 가지 의식이 치러진다. 첫째는 부모에 대한 강한 부정이고, 둘째는 문신이다. 하급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국가의 도둑으로, 어머니를 창녀라고 직접 말함으로써 그는 (공무원이자 선인인) 자신의 근원 혹은 정체성을 말소한다. 그 과정을 통과하자 문신이 새겨진다. 나중에 KGB가 찾아와 ‘언더커버’를 그만두라고 말하자, “나는 문신을 새겼다”며 거절한다. 문신은 주름이나 흉터와 마찬가지로 몸에 직접 새겨지는 ‘역사’이다. ‘몸에 별을 새긴 자가 보스의 아들’이라는 거짓 제보로 들이닥친 이들과 그는 알몸에 피 칠갑의 상처를 내며 싸우고, 마침내 아들로써 오이디푸스의 과제, ‘살부’를 완수한다. 그는 선을 악처럼 행하고 악을 선처럼 행한다. 그가 아기를 살린 것은 선이지만, 이는 살부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조직을 굳건히 지키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악을 행할 것이다. 그는 선악의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한 ‘선악동체의 혼종괴물’이기 때문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이스턴 프라미스>는 악인의 세계에 ‘백의의 천사’가 찾아와 본래 선인이었던 ‘타락천사’의 선의를 이끌어내는 혼종성을 담고 있다.
크로넨버그 감독에게 <개와 늑대의 시간>이 동원하는 기억상실이나 정체성 혼란의 호들갑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본래 ‘개는 곧 늑대’이기 때문이다. <이스턴 프라미스>는 그 점을 명확히 한다. 첫 이발소 장면에서 성탄절 타령이나 한다며 조카를 나무라던 이발사가 면도칼을 건네자 조카는 손님의 목을 ‘썬다’. 조산사가 러시안 식당을 처음 찾았을 때, 보스는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수프를 저으며 ‘아빠의 손맛’을 운운한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블루 벨벳>이 평온해 보이는 일상 가까이에 악의 세계가 존재함을 보여주었듯이, <이스턴 프라미스> 역시 착한 사람들의 세계와 접해 있는 악의 세계를 보여준다. ‘타락천사’는 ‘토끼 굴에 발을 들여놓은 앨리스’에게 말한다. “저기 착한 사람들의 세계로 돌아가라”고. 그런데 그런 것이 따로 있기는 할까? (KGB를 운운하는 삼촌도 알고 보면 허풍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지독한 동성애 혐오를 드러내는 보스의 아들이 주인공에게 느끼는 감정은 동성애다. 그는 아버지가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듦’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을 질투하지 않으며, 주인공을 미끼로 쓴 아버지의 행위를 사과하고, 급기야 아버지 대신 주인공을 선택한다. 그가 ‘호모’가 아님을 증명하라며 주인공에게 여자와의 섹스를 강요했던 건 자신의 동성애적 욕망을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표면과 전혀 다른 이면이 하나의 존재 안에 결합되어 있다는 인식이 감독의 세계관이다. 크로넨버그의 영화에서 핵심적인 또 하나의 화두는 바로 ‘몸’이다. <플라이>나 <크래쉬>에서 몸은 직접적인 변환을 거친다. 그 몸은 ‘옷’이라는 환상의 장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파리-인간’은 ‘스파이더맨’의 복장이 필요 없으며, <폭력의 역사>의 부부는 치어리더 복장이라는 환상의 장치를 걸쳤을 때보다 발각된 폭력성을 감추지 않았을 때 훨씬 강렬한 섹스를 할 수 있었다. 변신, 다중인격, 기억상실의 장치 역시 일종의 ‘옷 갈아입기’ 게임으로, 그의 세계에선 불필요하다. ‘알몸’으로 표상되는 실존주의가 그의 철학이다. ‘알몸’으로 표상되는 실존주의 <이스턴 프라미스>에서도 이는 ‘문신’과 ‘알몸 격투’를 통해 관철된다. 주인공이 조직의 멤버가 될 때, 그에겐 두 가지 의식이 치러진다. 첫째는 부모에 대한 강한 부정이고, 둘째는 문신이다. 하급 공무원이었던 아버지를 국가의 도둑으로, 어머니를 창녀라고 직접 말함으로써 그는 (공무원이자 선인인) 자신의 근원 혹은 정체성을 말소한다. 그 과정을 통과하자 문신이 새겨진다. 나중에 KGB가 찾아와 ‘언더커버’를 그만두라고 말하자, “나는 문신을 새겼다”며 거절한다. 문신은 주름이나 흉터와 마찬가지로 몸에 직접 새겨지는 ‘역사’이다. ‘몸에 별을 새긴 자가 보스의 아들’이라는 거짓 제보로 들이닥친 이들과 그는 알몸에 피 칠갑의 상처를 내며 싸우고, 마침내 아들로써 오이디푸스의 과제, ‘살부’를 완수한다. 그는 선을 악처럼 행하고 악을 선처럼 행한다. 그가 아기를 살린 것은 선이지만, 이는 살부를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그는 앞으로도 조직을 굳건히 지키며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악을 행할 것이다. 그는 선악의 구분이 더 이상 무의미한 ‘선악동체의 혼종괴물’이기 때문이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