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고백부터 하자. 로큰롤을 하는 실버밴드가 있다는 아내의 말에 반신반의했다던 스티븐 워커 감독처럼 나도 그랬다. 지금 인기가 한창인 밴드 콜드플레이의 <픽스 유>(Fix You)를 부르는 평균 연령 80살 노인들의 이야기라면, 뭔가 속임수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사회장 앞에 선 나는 벌써부터 이 영화에 대해 ‘은퇴 뒤의 안락한 삶을 보내던 중산층 노인들의 여가생활’ 혹은 ‘로큰롤은 젊음의 음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위해 편집된 다큐멘터리’ 정도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가 시작된 지 10여 분도 지나지 않아 나는 무너졌다. 아이고, 이 노친네들 앞에선 그 어떤 비평적 관점도, 태도도 소용없었다. 그들이 누구든, 무엇이든 혹은 어디에 있든 간에 이 영화는 어떤 진정성을 전달한다. 진정성이라는 말을 함부로 남발하는 건 아니다. 그건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할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지독하게 사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누구도 삶과 죽음 앞에서는 결코 객관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중환자실에서도 노래하는 노인들
스티븐 워커 감독이 연출한 다큐멘터리 영화 <로큰롤 인생>(원제: Young@Heart)은 73살부터 93살까지 미국 노스햄턴 출신의 노인들로 구성된 ‘영@하트’(Young@Heart)라는 코러스 밴드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밥 딜런과 클래시, 데이비드 보위와 콜드플레이의 히트곡들을 노래하며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순회공연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로큰롤을 부른 건 아니다. 밴드가 처음 결성된 1982년에는 그저 동네 노인들의 사소한 노래 모임이었다. 나이에 걸맞게 클래시컬 음악과 TV의 오페라 프로그램을 좋아하던 그들이 변한 건 ‘릴’이라는 멤버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무대에서 무심하게 맨프레드 맨의 <두 와 디디>(Doo Wah Diddy)를 불렀고 관객은 열광했다. 그날 이후 멤버 중에서 가장 젊은 밥 실먼 단장의 지휘 아래 영@하트는 ‘로큰롤을 부르는 실버밴드’로 거듭났고 1996년에는 유럽 12개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를 순회하며 공연을 선보였다. 영화 <로큰롤 인생>이 시작되는 시점은 부활절 연휴를 몇 주 앞둔 2006년 중반이다. 촉망받는 다큐멘터리 감독인 스티븐 워커는 아내에게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연을 본 뒤, 카메라를 들고 미국으로 떠났다.
섹스 피스톨스의 저 유명한 음반 <네버 마인드 더 볼럭스, 히어즈 더 섹스 피스톨즈>(〈Never Mind the Bollocks: Here's the Sex Pistols〉)의 표지를 연상시키는 오프닝으로 시작된 영화는 부활절 이후 ‘얼라이브 앤드 웰’(Alive and Well)이라는 공연을 준비하며 신곡 연습에 여념이 없는 노인들의 모습과 그들의 일상을 뒤쫓는다. 제임스 브라운의 <아이 갓 유>(I Got You)와 소닉 유스의 <정신분열증>(Schizophrenia), 그리고 토킹 헤즈의 <라이프 듀어링 워타임>(Life During Wartime), 앨런 투세인트의 <예스 위 캔 캔>(Yes We Can Can) 등 신곡을 연습하는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실패와 좌절, 그리고 그걸 극복하려는 의지가 카메라에 담긴다. 스크린은 활기차다. 암세포에 점령당하고 척추에 이상이 생기고 폐에 물이 차는 늙은 육신과는 무관하게 살아 있는 것 자체를 즐기는 일상은 유쾌하고 유머러스하다. 이를테면 그들은 죽음에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노래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사실 그들이 부르는 노래의 장르가 로큰롤이든 클래시컬 음악이든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뭔가를 계속 해나간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의미인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로큰롤 인생>을 보며 무너진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영화가 마케팅이나 흥행 성적과는 별개로 강렬한 진정성을 획득하는 이유다.
사실 이제 겨우 서른 몇 해 정도를 살아온 자로서는 80여 년을 살아온 사람들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언급할 깜냥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건 이해 이전의 문제다. 그 시간을 온전히 살아온 사람들만이 과거를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중환자실과 신장결석과 ‘마지막 순간에 본다던 하얀 빛’에 대해 농담을 건네는 걸 보면서 ‘죽음조차도 농담이 되는 삶’이라고 툭, 말해버릴 순 없다. 그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죽음이 늘 그들 곁에 머물러도 언제나 두렵다는 건 변함없으리라는 사실만 어렴풋이 짐작할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 농담을 사사로이 나누면서도 며칠 전 멀쩡하게 함께 노래를 연습하던 멤버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그들의 모습은 그저 먹먹하게 전달될 뿐이다. 우리보다 죽음에 더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죽음이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얼마나 잔인한 편견인가. 그래서 그들은 병자성사를 받은 직후에도 중환자실에 누워 노래를 부른다. 당장 면역력이 약해져 백혈구를 수혈받으면서도 몇 주 뒤의 공연을 걱정한다. 공연 날 아침 멤버의 죽음을 전달받고도 예정된 공연을 끝까지 해낸다. 그들의 삶이 증거하는 진정성은 거기에 있다. 먼저 떠난 멤버에게 밥 딜런의 <포에버 영>(Forever Young)을 바치는 그 순간을 어떻게 글로 설명할 수 있을까. 영화는 ‘로큰롤을 부르는 실버밴드’를 죽음과 삶의 비장한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감싼다. <로큰롤 인생>은 그런 삶의 의지를 오롯이 전달하는 영화다.
먼저 떠난 멤버에게 <포에버 영>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마침내 자기 삶의 의미를 온전히 부여할 만한 뭔가 하나쯤 찾기 마련이다. 영@하트 멤버들에게는 그게 노래였을 것이다. 아마도 삶은 그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걸 보면서 ‘중산층 노인들의 안락한 여가생활’쯤이라고 생각한 게 좀 부끄러워진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수록곡과 뮤직비디오가 삽입돼 감독이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밴드가 한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내부에서도 인종과 계층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엮인 갈등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커뮤니티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늘상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평등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의 유일한 동기가 삶 자체라는 건 압도적이리만치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2시간 정도 이 노인네들과 함께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내내 떠오른 건, 유치하게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물론 5살짜리 꼬마가 이천희에게 평생자산관리를 권하는 방송 광고가 나오는 이 땅에서라면, 영@하트의 멤버들 같은 노년을 꿈꾸는 건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처럼 늙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
병들고 다투고 심지어 죽어도, 그들의 연주는 계속된다. 영원히 젊은(forever young) 할머니·할아버지 밴드의 로큰롤은 끝나지 않는다.
먼저 떠난 멤버에게 <포에버 영>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마침내 자기 삶의 의미를 온전히 부여할 만한 뭔가 하나쯤 찾기 마련이다. 영@하트 멤버들에게는 그게 노래였을 것이다. 아마도 삶은 그때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걸 보면서 ‘중산층 노인들의 안락한 여가생활’쯤이라고 생각한 게 좀 부끄러워진다. 물론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임에도 수록곡과 뮤직비디오가 삽입돼 감독이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밴드가 한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점에서, 내부에서도 인종과 계층과 다양한 이해관계가 엮인 갈등이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이 커뮤니티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늘상 존재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가장 평등한 곳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의 유일한 동기가 삶 자체라는 건 압도적이리만치 강한 설득력을 가진다. 2시간 정도 이 노인네들과 함께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내내 떠오른 건, 유치하게도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 같다. 물론 5살짜리 꼬마가 이천희에게 평생자산관리를 권하는 방송 광고가 나오는 이 땅에서라면, 영@하트의 멤버들 같은 노년을 꿈꾸는 건 ‘희망사항’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처럼 늙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우진 대중문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