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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알몸의 참된 의미를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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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8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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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누드사진의 어제와 오늘, ‘민병헌 사진전’ 등 한꺼번에 열리는 세 가지 전시회

사진/ 강대석, 1930년대(위 왼쪽)정철용, 1970년대(위 오른쪽)이형록, 1950년대(아래)
오늘날 누드사진은 너무나도 일상화돼 있다. 누드사진은 그야말로 도처에 널려 있고, 포르노사진들도 예상 외로 가까이 침투해 있다. 사진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누드에 도전한다. 누드를 통해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기도 하고, 또는 예술가라는 통과 의례적인 호기심 때문에 혹은 육체를 통해서 조형능력을 키우고 싶어 누드를 찍기도 한다. 특히 요즘에는 신체와 성에 대해 사회·문화적 관심이 높고 개방적인 사회가 되면서 유행과 열병처럼 누드사진이 넘쳐나고 있다.

20년대 뒷모습 누드에서 90년대 셀프누드까지

한국사진사에서 누드사진을 처음 찍은 사람은 1930년대 강대석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950년대는 서순삼, 김한용, 김광덕이, 1960∼70년대는 문선호, 박여일, 정운봉, 이용정이, 78∼80년대는 이창남, 이재길, 방상훈 등이 계보처럼 이어지며 누드사진을 찍어왔다. 90년대 이전 한국 누드사진의 특징은 모델이 전부 여자였다는 점이며, 일상적 공간이 아닌 자연이나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누드사진이 많았다는 점이다.


사진/ 김한용, 1970년대(위 왼쪽)송기엽, 1970년대(위 오른쪽)이창남, 1980년대(아래)
1920∼30년대 강대석의 누드사진은 대단히 소박하면서도 아름답다. 자연 속에서 찍은 그의 흑백 누드사진은 여성의 앞모습은 보이지 않고 두손을 활짝 치켜든 뒷모습만 찍힌 누드사진이다. 여성의 알몸을 당당하게 카메라 앞에 내놓을 수 없는 시대상황에 찍힌 한국 예술누드의 백미 가운데 하나다. 1950년대 들어서면 서순삼, 김한용 등 조형감각이 뛰어난 작가들이 실내 스튜디오 누드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인공 조명을 이용해 실험적이며 지극히 조형적인 누드사진을 주로 찍었다.

60∼70년대 누드사진을 보면 정운봉, 박여일, 김광덕의 누드사진이 눈길을 끈다. 이들은 누드를 전적으로 예술로 신봉하는 경향이 짙었다. 이 시기 작가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이는 박여일이다. 60년대에 찍은 그의 작품 가운데에서는 두 여성이 야외에서 신체접촉을 하는 작품이 있다. 마치 오늘의 레즈비언 누드를 연상하기에 충분하지만, 자연스럽고 투명해서 그저 아름다운 누드사진으로만 다가온다.

80년대 들어 누드사진은 아마추어 사진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와 정부의 문화개방 정책으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담해지고 표현성이 확대됐다. 또한 카메라 기기의 발달로 모터드라이브 장착이 일반화됨으로써 동감을 강조한 누드사진과 하이스피드 셔터에 따른 순간정지 누드사진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마추어 사진가들에 의해서 여전히 과거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모델을 산과 들, 호수의 갈대밭이나 오래된 폐가 또는 괴석이나 눈밭에 자리시키는 저급한 누드사진들도 여전히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누드사진이 좀더 세련되고 반드시 예술로서가 아니라 신체 자체로서 말하려는 누드사진이 등장한 것은 바로 90년대부터다. 90년대는 문화 전반에서 여성의 누드가 성적비하로 규정되어지는 시기이면서 동시에 텔레비전, 영화, 신문, 잡지에서는 여성의 누드가 상품으로 또는 눈요깃거리로 난무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기의 누드사진은 좀더 주도면밀한 전략을 요구했다. 누드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이 변했으며, 누드는 타인이 아닌 자신의 신체로부터 나오는 동시에 보편적 일상으로부터 발현되어야 한다는 새로운 시각이 등장했다. 그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셀프누드이다.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아의 시선으로 누드에 다가가고 기존의 예술누드가 갖고 있는 전형성과 고답성을 해체시킴으로써 남성누드가 출현한 시기이기도 했다. 여성 사진가들도 등장해 성적 차별에 대한 메시지를 담은 여성 누드를 찍기 시작한 것도 90년대부터다.

누드의 격을 감별하는 눈

사진/ 구본창, 1990년대(위 왼쪽)민병헌, 2000년대(위 오른쪽)이용정, 1970년대(아래 왼쪽)이재길, 1990년대(아래 오른쪽)
이러한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스타일의 누드사진이 오늘 한국의 누드사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런 한국 누드의 흐름과 현황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요즘 한꺼번에 열리고 있다.

카이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민병헌 사진전’(5월12일까지, 02-511-0668)은 고전적 흑백 누드사진의 전형으로서 클래식하면서도 아카데믹한 광선, 구도 그리고 형식적 내재율은 여성의 신체를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으로 이끄는 개성있는 예술누드의 본보기이다.

포토아이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누드사진의 흐름전’(02-737-1311)의 경우는 앞서 말했던 한국 누드사진의 전모를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사진들이 말하듯 80년대 이전까지 여성 누드작가가 이 땅에 없었던 상황에서 오로지 남성 사진가들의 시각에서 여성의 육체를 바라보고 오로지 예술적 소재로서만 여성의 신체에 다가섰던 형식미 우선의 누드사진의 총체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 최창익, 2000년대(왼쪽)이수경, 1990년대(오른쪽)
또 다른 빼놓을 수 없는 전시는 로댕갤러리에서 열리는 ‘구본창 사진전’(6월24일까지, 02-2259-7781∼2)과 대구 대백프라자 갤러리에서 열리는 여성 작가 노현혜의 누드사진전 ‘붉은방전’(5월14일까지)이다. 구씨는 작가 자신과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누드사진을 선보이고 있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신체를 말하고 가족의 계보로까지 연결시키는 그의 누드사진은 대단히 신선하다. 기법에서도 다양한 형식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전통적 누드사진의 평면성을 넘어 조각적 영역까지 확대하고 있다. 반면 노씨는 여성작가로서 자신을 포함해서 여성의 신체를 찍어 가부장제 아래 남성중심 사회에서 순응하는 보편적 여성들의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오늘의 누드사진은 과거처럼 오로지 예술의 이름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여성의 몸을 어떻게든 아름답게 표현하려는 지난 시절의 예술누드는 상당히 후퇴했다. 대신 게이, 레즈비언과 같은 우리 시대 성의 정체성을 말하는 누드사진이 등장했고 가족의 유대감과 귀속감을 드러내는 혈연적 누드사진도 나타났다.

이제 누드는 누구나 스스럼없이 찍을 수 있는 단계까지 왔지만 그러나 정작 누드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찍은 사진들은 많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누드사진을 올바로 감상하고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드의 격(格)을 감별하는 바른 눈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자극적이고, 선정적이고 상투적인 누드에 비판적이어야 한다. 이런 누드사진들은 내용이 없거나 가식적인 형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경우가 많다. 모델을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면서 선정적인 포즈를 취하게 하거나 혹은 말초신경을 위해서 육체의 볼륨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연출시킨 사진이 그런 경우이다. 누드사진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델과 작가의 정신이 하나가 되어 거기에 형식과 내용에 균형을 이룰 때이다. “신체가 반응하면 외설, 정신이 반응하면 예술”이라는 말이 있다. 누드의 외설과 예술을 구별하는 데 참조하면 좋을 듯하다.

진동선/ 사진평론가·하우아트 갤러리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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