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만화 여섯권 출판한 윤승운씨… “역사만화 그리다 겉늙었어요”
그는 정말 그의 작품의 만화주인공 같았다. 발명을 한답시고 온갖 말썽을 피우지만 결코 미워할 수 없는 발명왕 요철이, 훈장님이 자리만 비우면 산으로 들로 땡땡이를 치다가도 훈장님 옛날 이야기가 시작되면 귀를 쫑긋 세우는 칠복이와 뚝쇠가 그의 얼굴 속에 담겨 있는 듯했다. 환갑을 앞둔 나이에도 한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이야기 보따리를 펼치는 그의 모습은 20대 청년처럼 생기가 발랄했다. 펜이 움직이기 시작한 지 1분이나 됐을까, 어느새 도화지에는 그처럼 동글동글 웃음기가 가득한 만화주인공들이 요술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에도 그림 속 주인공들의 눈매 그대로 웃음기가 눈꼬리에 걸려 있었다. 그는 천생 만화가였다.
세월의 벽 뛰어넘는 ‘오래가는’ 만화
70년대와 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만화가 윤승운(57)씨는 도시가 잃어버린 향수와 옛이야기의 재미를 대신 전해주는 시골집의 할아버지, 할머니 같은 존재였다. 9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잡지에 그의 연재물은 단골이었다. 천방지축 말썽을 피우지만 그래도 꿈을 잃지 않는 악동들의 이야기도 전매특허지만, 윤승운씨 만화는 뭐니뭐니해도 우리 역사 속 위인들의 본받을 만한 삶을 소개하는 역사물이었다. <맹꽁이서당>이며 <서당골 호랑이 훈장님> 같은 만화들이 그의 손끝에서 그려져 조상의 얼과 지혜를 어린 독자들의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전달했다.
열여덟에 만화를 시작해 어느새 작가 경력 40을 바라보지만, 그의 손끝은 쉼이 없다. 최근에는 무려 여섯권의 만화책이 한꺼번에 출판됐다. 모두 어린이용 위인만화들이다. <나도 큰 인물>(1∼2권·웅진시스템 펴냄)은 처음 출판된 것이고, 80년대 이후 작품인 <겨레의 인걸>(1∼4권·도서출판 산하)은 출판사를 바꿔 두 번째 출판됐다. 올해에만 모두 열두권의 ‘윤승운 만화’가 서점에 깔릴 예정이다. 요즘 만화시장은 그야말로 위축돼 있다. 그런데도 윤씨의 만화는 시장에서 확실한 수요층을 거느리면서 변함없이 꾸준히 팔린다. 대본소용 ‘공장만화’도 아니고 대여점용 만화도 아니다. 만화계의 주독자층인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폭력물도, 판타지물도 아니지만 세월의 변화를 뛰어넘는 은근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그의 만화를 보고 자란 부모들이 더 적극적으로 책을 고른다고 출판사쪽은 귀띔했다. “소극적이니까 이런 거 그리고 있지…, 이거 고생스러워요.” 경기도 남양주군의 ‘자연농장’으로 찾아가 만난 그는 정작 자신의 만화에 대해서는 아주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낙천적인 성격이 얼굴에 쓰여져 있었지만, 만화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스스로에 대해 짜디짠 평가만을 내릴 뿐이었다. “제 만화를 제가 보면 그렇게 창피해요. 밤새워 재미있게 그린다고 애를 썼어도 억지춘향을 그려온 거지. 쥐구멍 파고 들어가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는 스스로 성공한 만화가, 뛰어난 만화가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화 자체로는 자기 재능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꼭 덧붙였다. “아마 아이큐가 두 자리일 거야. 만화 그리기에는 머리가 나빠요. 사실 만화가들 중에는 재주좋고 머리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좌절감과 패배감을 늘 느끼고 살았고,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농사짓는 꿈을 꾸는 부부
80년대까지만 해도 그는 눈만 뜨면, 입만 열면 만화는 안 그릴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한다. 실제로도 늘 그는 농촌에서 농사짓는 꿈을 꿨다. 서울서 자랐는데도 농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부인도 그런 그와 의견이 같아 부부가 함께 농촌으로 가는 길을 닦아왔다. 76년 연세대 농업개발원 과정을 마쳤고, 경기도 남양주군에 야산이긴 해도 땅도 마련했다. 그게 지금 그가 틈나면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는 ‘자연농원’이다. 그러나 마흔줄을 넘기면서 앞으로 남은 세월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고, 그는 숙명처럼 만화를 평생의 길로 받아들였다.
그의 만화가 그토록 낙천적이고 명랑한데도, 직접 그리는 그는 만화가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모른다고 한다. 만화 그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지레 늙어버렸다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다른 데는 그렇게 인내심이 없었는데도 만화만큼은 참고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그의 웃기고 귀여운 그림체가 그렇게 40년 가까이 꼼지락대며 만들어낸 산물이다. 무엇보다도 어린이만화가 자신에게는 맞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다른 작가들이 80년대 고료도 많고 인기도 많은 성인물로 몰려갔을 때도, 인기 작가들이 한해에 수백권씩 제자들을 시켜 이름만 자기 이름으로 내는 공장만화를 찍어내며 돈벌이에 열중일 때도, 그는 혼자서 어린이 잡지에 남았다. 이제, 비슷한 나이의 작가들이 시대적 감각에서 뒤처져 일감이 끊겨버렸지만 우직하게 남은 그만이 꾸준히 인기를 얻는 것은 그런 고집과 뚝심의 보상인지도 모른다.
요즘 그는 농장일에 재미가 들려 경기도 평촌의 집보다 남양주에 마련한 ‘자연농원’에 틀어박혀 있는 날이 더 많다. 창고건물에 곁가지로 집어넣은 방에서 만화도 그리고, 호박도 심고, 그리고 두 마리 개를 키우면서 혼자 지낸다. 올해 초 금연을 결심하고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금연 결심은 다시 깨져버렸고, 대신 멋들어진 콧수염이 남았다.
그가 역사만화 그리다 겉늙었다고 웃을 정도로 역사만화는 쉽지 않은 난제라고 한다. 만화가에게 고생스러운 게 이야기 짜내는 건데 역사만화야 이야기가 이미 있고 자료도 많으니 쉬워보일 것 같지만, 모르는 말씀이란 것. 공부를 해도 해도 끝이 없다는 게다. 실제로 그가 보여주는 메모지에는 빈틈없이 연보와 한자 이름들이 빼곡했고, 온갖 화살표와 문장부호들이 여기저기로 뻗어 있었다. 네쪽짜리 만화 한회에 그런 메모지가 많을 때는 수십장씩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도 요즘에는 참 좋은 책들이 많이 나와서 편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우리 역사 속의 그렇게 좋은 조상들 이야기를 모르는 게 좀 아쉽죠.”
“내 마음의 스승은 아직도 길창덕”
대학문도 못 밟았지만 역사만화가 배움이 부족했던 그의 학식과 식견을 트이게 해줬다고 한다. 만화를 그리기 위해 그는 올해로 7년째 성균관대 사회교육원 한문연구과정을 다니고 있다. 그렇게 역사에 온 관심을 쏟으며 만화를 그리다보니 ‘직업병’도 생겼다. 사람만 만나면 “어디 무슨 씨냐, 본관은 어디 아니냐” 시시콜콜 물어보는 버릇이다. 그리곤 “그 성씨에는 무슨 아무개 양반이 있는데 출중한 분이셨다”는 역사강의가 절로 튀어나온다.
윤씨는 집안에서는 자기 만화의 인기가 ‘별로’라며 웃었다. 부인도, 이제 시집간 큰 딸도 군을 제대한 아들도 윤씨가 <맹꽁이서당>을 그릴 80년대부터 윤씨보다는 김수정씨를 더 좋아했다는 거다. “둘리만 보면 뒤집어지고 밤새도록 보더라구, 우리 애들은 둘리보면서 컸어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사위도 ‘희동이’(김수정씨의 <아기공룡 둘리>에 나오는 둘리를 괴롭히는 아기 이름) 닮았어요.”
그는 아직도 자신이 마음의 스승인 선배만화가 길창덕씨의 아류일 뿐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어느 누가 만화가 윤승운을 아류로 기억할까. 이제 그는 어엿한 ‘본류’로 한국만화계에 자리를 매겼다. 더 좋은 작품으로 그 자리를 넓히는 것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런 과제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윤씨의 사람좋아 보이는 얼굴에는 웃음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구본준 기자bonbon@hani.co.kr


열여덟에 만화를 시작해 어느새 작가 경력 40을 바라보지만, 그의 손끝은 쉼이 없다. 최근에는 무려 여섯권의 만화책이 한꺼번에 출판됐다. 모두 어린이용 위인만화들이다. <나도 큰 인물>(1∼2권·웅진시스템 펴냄)은 처음 출판된 것이고, 80년대 이후 작품인 <겨레의 인걸>(1∼4권·도서출판 산하)은 출판사를 바꿔 두 번째 출판됐다. 올해에만 모두 열두권의 ‘윤승운 만화’가 서점에 깔릴 예정이다. 요즘 만화시장은 그야말로 위축돼 있다. 그런데도 윤씨의 만화는 시장에서 확실한 수요층을 거느리면서 변함없이 꾸준히 팔린다. 대본소용 ‘공장만화’도 아니고 대여점용 만화도 아니다. 만화계의 주독자층인 청소년들이 좋아하는 폭력물도, 판타지물도 아니지만 세월의 변화를 뛰어넘는 은근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그의 만화를 보고 자란 부모들이 더 적극적으로 책을 고른다고 출판사쪽은 귀띔했다. “소극적이니까 이런 거 그리고 있지…, 이거 고생스러워요.” 경기도 남양주군의 ‘자연농장’으로 찾아가 만난 그는 정작 자신의 만화에 대해서는 아주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낙천적인 성격이 얼굴에 쓰여져 있었지만, 만화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스스로에 대해 짜디짠 평가만을 내릴 뿐이었다. “제 만화를 제가 보면 그렇게 창피해요. 밤새워 재미있게 그린다고 애를 썼어도 억지춘향을 그려온 거지. 쥐구멍 파고 들어가고 싶을 때가 많아요.” 그는 스스로 성공한 만화가, 뛰어난 만화가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화 자체로는 자기 재능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곤 꼭 덧붙였다. “아마 아이큐가 두 자리일 거야. 만화 그리기에는 머리가 나빠요. 사실 만화가들 중에는 재주좋고 머리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좌절감과 패배감을 늘 느끼고 살았고, 사실은 지금도 그래요.” 농사짓는 꿈을 꾸는 부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