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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찐따’를 위하여

연애 소수자와 ‘동성사회적’ 관계를 밝고 명랑하게 그린 영화 <미쓰 홍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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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10-16 14:00 수정 : 2008-10-16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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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슬픈 이유는 그들의 사랑이 세상의 인정을 받기 어려워서이기도 하지만, 사랑을 주고받을 인구군이 협소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슬픈 사람들이 있다. 세상은 이들에게도 사랑의 욕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은 이성은 물론 동성에게서도 사랑받지 못한다. 연애가 불가능한, 소수자 중의 소수자, 이른바 ‘찐따(들)’ 말이다. <미쓰 홍당무>는 일종의 ‘여자 왕따 성장담’으로 계보를 찾자면 <캐리> <내 책상 위의 천사>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뮤리엘의 결혼> <판타스틱 소녀 백서> 등과 친연성을 갖는다. 그러나 캐릭터 묘사와 결말은 전대미문의 독창성을 뽐낸다.

안면홍조증을 가진 ‘미쓰 홍당무’ 양미숙(공효진) 선생과 그가 흠모하는 서 선생의 딸이자 학교의 왕따인 서종희(서우)는 서 선생의 바람기를 잡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1등에 목을 매느니, 목을 매겠다

양미숙(공효진)은 깡마른 체구에 얼굴은 시뻘겋고, 목소리는 갑자기 흥분조로 변하는데다, 20년 전 촌티 패션을 고수하며, 교무실에서 자고, 학교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괴상한 여중 교사다. 그녀는 말한다. “사람이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녀에게 세상이 좀처럼 주려 하지 않는 변명의 기회를 주고, 그녀 같은 ‘비상식적 캐릭터’에 이해의 눈길을 허하려고 한다.

그녀가 엉뚱하게도 피부과 의사를 붙잡고 늘어놓는 ‘안면홍조증의 기원’은 고3 수학여행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욜라’ 촌스러운 복장의 그녀는 ‘왕따’였고, 아이들이 단단히 맞잡은 우정의 결계를 뚫지 못하고 혼자 안쓰럽게 도움닫기하다가 결국 단체사진 속 우스꽝스러운 얼룩으로 남았다. 그때 유일하게 그녀를 찾던 서 선생님(이종혁)을 짝사랑하게 되고, 이제 그와 같은 학교 선생님이 된 그녀는 “재재재작년 회식 때” 가벼운 신체 접촉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며 망상을 키워간다. 그러나 서 선생은 중학생 딸이 있는 유부남에다 예쁜 여선생과 사랑하는 사이다. 그녀는 전교 ‘왕따’인 서 선생의 딸과 의기투합해 둘을 갈라놓기 위해 온갖 ‘삽질’을 벌이는데 상황은 꼬여만 간다. 결국 그녀는 그토록 원하던 서 선생과 하룻밤을 보내지만, 그녀와 짝이 되는 것은 서 선생의 딸내미다. “찐따와 찐따 애인”이 되어 시시덕거리는 두 여자의 해피엔딩이라니! 참 파격적인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여성 왕따’ 스토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신데렐라>나 <미운 오리 새끼>가 제시하는 왕따 탈출 해법은 그녀의 땟물이 빠지고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주거나 자신이 백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지만, <미쓰 홍당무>는 그런 혁명적인 결말을 추구하지 않는다. “1등에 목을 매느니, 목을 매겠다”는 그녀의 지론처럼 영화도 소박한 결말을 추구하는데, 평범한 관심이 고팠던 그녀에게 그녀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 하나면 족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이라는 말처럼, 적당한 남자와 맺어주며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바퀴벌레’가 되도록 하는 것(가령 <영어완전정복>)이 통상적 결말이다. 그러나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찐따와 찐따 애인”이 된 두 사람은 모두의 야유 속에서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공연을 펼치고(이 장면을 <어바웃 어 보이>의 공연 장면과 비교해보라. 휴 그랜트는 무대에 함께함으로써 소년을 ‘왕따’의 위기에서 구출하지만, 그녀는 ‘전교 왕따’의 자리를 확고히 굳혀준다), 공연을 마치자 마치 환호라도 받는 듯(<죽어야 사는 여자>의 메릴 스트립과 골디 혼처럼) 팔짱을 끼고 킬킬대며 교정을 내려가는데, 이러한 엔딩은 우리 사회의 공고한 ‘이성애 커플주의’에 강펀치를 날리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동성사회적’(homosocial) 관계다. 그녀가 안면홍조증을 얻은 것도 (이성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고에서의 따돌림 때문이다. 그녀가 서 선생을 사랑해서 펼치는 소동들도 여자들과의 관계로 이뤄진다. 그녀는 사모님의 교습소를 다니고, 예쁜 선생의 집에 들어가 함께 살며, 딸내미와는 밤새 채팅과 연극 연습을 한다. 그녀들이 성적 판타지를 발산한 채팅 상대자도 예쁜 선생이다. 여기서 서 선생은 “커진다커진다커진다…”라고 쳐대면 저편의 예쁜 선생은 흥분하고, 이 편의 두 여자들은 우정이 돈독해지는, 문자 그대로 ‘텅 빈 기표로서의 남근적 존재’에 불과하다.

남자는 그냥 가운데 말뚝 박아두고

5자 대면의 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되기도 하고, 성추행이 되기도 하며, 어찌 보면 가정파괴범이 되기도 하는 사안의 복잡성은 모두 그녀와 딸래미와 사모님의 말에 의해 의미가 좌우된다. 서 선생은 갈등의 중심에 있긴 하지만 기실 그녀들이 펼치는 마당극 한가운데 박힌 ‘말뚝’이다. 에필로그에서 두 여자는 피부과 의사를 찾아가는데, 그 역시 두 여자의 ‘말뚝’이 될 것이다. 이처럼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을 ‘텅 빈 중심’으로 사고하고, ‘주변’에서 회전하는 여성들 간의 애증 관계에 착목하는 시선은 이미 단편 <잘돼가? 무엇이든>에서도 보았던 이경미 감독 특유의 것이다.

<미쓰 홍당무>의 결말이 여교사와 여학생 간의 결합이라고 해서 동성애 영화로 볼 수는 없다. <여고괴담4-목소리>에서 여교사와 여학생의 관계는 어떤 이성애 관계보다 농밀했다. 그러나 “찐따와 찐따 애인”은 그러한 농밀함이 없다. 이는 그녀와 서 선생 간의 관계가 <연애의 목적>의 스캔들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쓰 홍당무>에서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멜로가 불가능한, 뭘 해도 시트콤이 되고야 마는 찐따(들)’이다. 이와 가장 대극에 놓인 사람이 사모님이다. 그녀는 전신 깁스를 하고 병실에 누워서도 9살 연하의 봉사자를 엎어뜨렸고, “난 니가 마음에 든다”는 한마디로 결혼에 성공한다. 세상에는 성적 매력이 충만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모든 멜로가 이성애든 동성애든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인간들에 대한 헌사이지만, <미쓰 홍당무>는 그렇지 못한 ‘애정 소수자’들에게 관심의 눈길을 돌린다.

비슷한 여성들 간의 결합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린 <몬스터>나 <봉자>와 비교해보면, <미쓰 홍당무>가 이들의 관계를 굉장히 밝고 명랑하게 승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들을 대상화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들은 더 노력해야 해…” “열심히 해도 소용없어…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마” 같은 대사들을 통해 그들의 자의식과 목소리를 담아내기 때문이다. 영화는 산만하고 매끄럽지 못한 편집에 웃음의 코드도 썰렁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연애 소수자들을 위한 영화라는 점에서 가치 있다. 한마디로 ‘꽃들에게 희망을’ 혹은 ‘그 얼굴에 햇살을’을 외치는 영화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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