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에 하나.”(You either love it or hate it.) 영국 생활의 든든한 조력자인 친구가 지난 8월께 내가 살 집을 대신 알아보던 중 한 집에 대해 설명하며 이렇게 얘기했다. 친구가 보내온 사진을 열었을 때, 내가 그 집에서 살 거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고, 결론적으로 그 집은 지금 내가 이 칼럼을 쓰고 있는 집이 됐다. 하늘색 가구와 가죽이 다 닳은 나무 의자와 노란색 커튼이 있는 이 집, 말이다.
런던은 집값이 만만치 않다. 서울로 치면 강북에 해당하는 동쪽이 서쪽보다 집값이 그나마 낮은 편이다. 도시 중심에서부터 지역(존)을 나누는데, 1~2존까지 중심부에 속한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런던의 남동쪽 2존 지역에 있다. 중심부에 가깝기는 하지만, 어딘가 외곽 느낌이 풍기는 그런 곳. 게다가 우범 지역으로 명성이 있다. 학교에 가깝고 부담 없는 곳은 혼자 살기엔 위험하다 싶은 곳이 많았고, 안전만 최우선으로 생각하면 학교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동시에 월세가 훌쩍 뛰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학교 근처지만 그래도 안전한 곳에 위치해 있고, 월세도 다른 곳보다 싼 편이며, 층수도 높았다. 조건도 조건이지만, 이 집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된 것은 이 집이 오래된 집이기 때문이었다. 오래된 집. 깨끗하고 편리한 집은 서울에서도 많이 살아봤으니까. 영국에서의 1년까지 서울의 연장선이라면 재미없지 않은가.
이 집은 ‘빅토리안 하우스’라고도 하는, 그러니까 꽤 오래전에 지어진 전형적인 영국풍의 집이다. 돌계단을 지나 상처가 많은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좁은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돌고 돌아 집의 꼭대기층, 다락층이라고도 할 수 있는 4층에 올라가면 하늘색 문이 나온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이상한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묘한 집이 등장한다. 모든 가구의 색깔은, 꽤 오래전에 칠한 것으로 짐작되는 하늘색이다. 걸을 때 ‘끼익끼익’ 소리가 나긴 하지만, 작은 부엌과 다락방 분위기의 운치 있는 화장실, 볕이 들어오는 작은 테라스, 커다란 책상이 있다.
이 집의 특징은 벽마다 걸려 있는 포스터다. 연극 <햄릿>의 1980년 투어 포스터, 영국 잡지 <타임아웃>의 1984년 커버, 전시 포스터 따위가 걸려 있다. 몇 개의 서랍에는 낡은 종이가 가득하다. 한 여자의 빛바랜 흑백사진, 1970년대 <이브닝포스트>, 누군가 멋대로 그린 그림까지 이 집의 자기소개서라도 되는 것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부엌 찬장에 나란히 진열돼 있는 컵은 지금까지 이 집에서 산 사람들이 어디로 여행을 다녀왔는지 한눈에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다양하다.
집에는 조각가인 집주인의 취향이 그대로 담겨 있고, 이곳에 살던 이들의 손길이 남아 있다. 내년 이맘때 내가 이 집을 나갈 때가 되면, 여기 찬장에는 내가 가져다놓은 컵이 몇 개 추가될 거고, 내가 찢어놓은 종이가 서랍에 몇 장 더 쌓이겠지. 그렇게 또 새로운 주인을 맞고 시간이 지나가도 이 공간은 나를 기억해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이 집을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인용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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