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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혹시 기억나십니까, 아방강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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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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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모르면서 말로만 중요하다고 들어온 다산 정약용의 ‘우리나라 땅 이야기’처음으로 완역하다

사진/ <아방강역고> 한글 번역본을 낸 정해렴씨. 96년 이후 실학자들의 대표적 저술을 번역하는 작업에 천착해왔다.(이정용 기자)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무척이나 어려워보이는 이름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고교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왠지 낯이 익은 단어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국사책에서 배웠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는, 우리나라 수험생들이 한때 무작정 달달 외웠던 이름 가운데 하나다. 바로 조선조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이 귀양살이 시절 썼던 책의 이름이다.

<아방강역고>(이하 <강역고>)가 어떤 책인지 아는 사람은 드물디 드물다. 국사교과서에는 그저 그 이름만 언급하고 정약용이 지은 책, 중요한 저술이라고만 말하고 언급돼 있기 때문이다. 사실 책의 이름만 알면 어떤 책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나라(아방) 땅(강역)에 대한 연구(고)’, 즉 ‘우리나라 땅 이야기’인 셈이다. 전남 강진으로 유배간 다산이 1811년 이 책 10권을 썼고 이후 3권을 다시 추술해 완성했을 만큼 이 책에 많은 공을 들였다. 1833년 뒷부분 3권을 보완해 완성하고 3년이 지난 뒤 다산은 일흔두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실학의 거두 정약용이 지은 책, 그리고 국사책에 나올 정도로 중요한 책인 이 <강역고>는 그동안 잊혀진 책이었다. 사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이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학자라는 정약용의 이 중요한 저술이 그동안 제대로 번역되지 않았던 탓이다. 몇권의 번역서는 있었지만 모두 내용 전체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부분만을 간추려 뽑아내 번역한 초역(抄譯)이었다.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비교적 오래지 않은 이 책의 완역본조차 없다는 점은 어찌보면 어처구니없는 노릇이다. 그토록 다산이 위대하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그의 저술을 연구하는 학자가 거의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누구나 다산하면 떠올리는 <목민심서>도 80년대 들어서야 다산연구회에서 처음으로 완역했을 정도였다.

이 <강역고>의 완역본이 최근에야 나왔다. 그리고 번역자는 사학자가 아닌 출판인 정해렴(62·현대실학사 대표)씨다. 창작과비평사 대표를 지낸 정씨는 정년퇴직한 1996년 이후 다산의 저술을 번역하는 일에 매달려왔다. 정씨는 96년에는 <다산문학선집>과 <다산논설선집>을 편역한 것을 시작으로 실학자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을 번역한 <성호사설 정선>과 다산의 <흠흠신서>, 그리고 올해 펴낸 이수광의 <지봉유설> 번역본과 이 <강역고>까지 실학의 대표적 명저들을 번역해왔다. 그를 만나 우리 고전 번역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다산 정약용 그는 역사 뿐 아니라 법학, 의학에서도 최고수준의 학문을 이뤘다.
-<강역고>가 도대체 어떤 책이고 어떤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책의 의미를 간단히 설명해주시죠.

= <강역고>는 다산이 우리나라 고대와 중세의 역사와 지리를 실증사학적 방법으로 종합해 정리한 우리 지리역사서입니다. 실증사학적 방법이란 사서(史書)나 지지(地紙)를 쓸 때 다른 사서와 지리를 가지고 진실을 증명하거나 부정하는 방법입니다. 다산은 중국 역사서와 지지에 언급된 우리나라의 기록, 그리고 <삼국사기>와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의 우리나라 자료들을 모두 비교분석해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우리 고대, 중세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삼국사기> <고려사>와 함께 이 <강역고>를 읽어야만 할 것입니다.

-<강역고>가 기존 사서나 지지와 다른 점은 어떤 것입니까.

= 다산은 <삼국사기>나 <고려사> 지리지의 잘못된 기록이나 빠져 있는 사실을 많이 바로잡고 보충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주체적인 사관으로 우리 역사를 정리한 것입니다.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기술하지 않았던 발해사와 가야사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킨 것은 다산 사학이 이룬 가장 큰 업적입니다. 동시에 다산은 저술 자체보다 지은이의 높은 관직과 이름에 따라 그 저술의 가치를 평가하는 풍조를 비판하며 철저한 고증으로 사실확인에 힘을 쏟았습니다. <고려사> 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 백제 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의 위치를 잘못 기술한 부분을 지적하고 “가난한 집의 빈궁한 선비가 관각의 대신이 쓴 저서를 틀렸다고 일일이 나무라는 셈이지만, 사실이 그렇다. 부귀가 무르익고 일이 바쁜데, 또 어찌 왼손으로 경서를 잡고 오른손으로 역사책을 보면서 꼼꼼히 조리를 살필 수 있겠는가”라고 일갈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고려사를 편찬한 정인지와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참여한 서거정을 비판한 것이죠.

-출판인으로 평생을 보내셨는데 다산 연구가로 나선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 어려서부터 다산과 같은 나주 정씨이고 다산의 종후손이란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창작과비평사(창비) 사장 시절인 80년대 초반, 다산연구회에서 <목민심서>를 낼 수 있겠냐고 문의해와 책을 내게 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편집과 교열 실무를 맡으면서 다산학의 깊이에 눈을 뜬 거죠. 이후 창비에서 <다산시선> 등 다산 관련 서적 9권을 연달아 냈고, 정년퇴직하면 평생 다산 연구와 소개 작업을 해보겠다고 결심하고 현대실학사를 만들었습니다. 책만 만들어온 책인생인데 다른 건 할 일이 없죠.

- 직접 책을 번역하시면서 접한 다산의 진면목이 어떻다고 보십니까.

= 다산은 귀양살이 18년을 했습니다. 남들 같으면 절망 속에서 몸과 마음가짐이 흐트러질 텐데 다산은 “이때가 공부할 때다”라고 생각하고 책을 파며 저술을 했던 것 같습니다. 다산이 남긴 저술은 모두 500권인데 400쪽짜리 요즘 책으로 따지면 50여권 정도니까 대단한 양입니다. 흔히 다산을 천재라고만 여기지만 제가 보기에는 노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일군 인물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관심을 가졌던 모든 분야에서 최고의 반열에 오른 분입니다. <아방강역고>를 보면 역사에서 최고수준의 학문을 했고, <흠흠신서>를 보면 법학, <마과회통>을 보면 의학에서 당대 최고의 연구자였습니다.

- 학자도 아니고 전공자도 아니어서 번역작업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 <아방강역고>는 꼬박 6개월이 걸렸습니다. 편집·교정 인생 38년 동안 국사관계 서적을 제법 많이 취급했다는 막연한 기대만 가지고 용감하게 대든 셈인데, 최선을 다하고자 할 뿐이죠. 문제는 우리 학교에서 ‘이런 책이 있다’라고만 가르치지 책의 내용은 다루지 않는 점입니다. 완역본이 없어 내용을 모르니까요. 실학에 대해 공부하다보니 일반인들이 볼 만큼 정돈된 자료가 별로 없어요. 결국 우리 학계의 학문 깊이가 얕고, 번역에 대한 의식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 요즘 시대에 다산의 학문과 책이 갖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요.

= 우리 고전에 대한 번역의 역사는 짧은데 서구의 사상과 문물은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구것에 정신을 다 팔고 이런 우리것 우리사상은 그냥 건너뛰어버립니다. 결국 우리가 실학을, 다산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민족정신을 계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정신을 차린 뒤에야 세계에 나갈 수 있는 건데, 지금처럼 빈 껍데기로 나가면 결국 외래것에 예속될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예속되는 것이 결국 남의 종이 되버리는 것이죠.

우리나라는 조선 말까지 한문으로 문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세기 들어 한글로 문자생활이 바뀌면서 이전 자료들을 지금 우리는 읽을 수가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면 역사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우리 선조가 남긴 우리 문화 유산이 왜 중요한지를 모르니까요. 실제 내용은 모르면서 말로만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고전 번역본이 있어야 합니다. 외국서 기술 빌려 오듯 문화와 정신을 빌려오는데, 우리 주체성이 서 있지 못하면 외국것들이 옳고 그른지도 스스로 판단을 못해요.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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