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315편이다. 그중 월드 프리미어가 85편, 인터내셔널 프리미어가 48편이다. 쉽게 말해 세계에서 내가 첫 번째 관객이 될 수 있는 영화가 85편, 자국에서의 상영을 제외하고 세상에 첫 공개되는 영화가 48편이다. ‘몇 번째로 상영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야?’라며 심드렁하게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영화광들에게 자신이 특정 영화를 처음 목도하는 자라는 사실은 비록 자기 혼자만의 즐거움일지언정 매우 절실한 문제다. 영화제의 프로그램이 공개되는 날부터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짐을 얹어놓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이다. 도대체 어떤 영화를 선택해야 뒤늦게 후회하지 않을까? 사실 그 누구의 견해에도 의존하지 않고 직접 영화의 바다 속에 들어가서 보물을 건져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니 (이번 영화제에서 내심 그런 기쁨을 기대하는) 필자 역시 독자 여러분의 처지와 마찬가지임을 밝히며 일단 표면으로 드러난 영화제의 흥미로운 구석구석을 살펴보겠다.
슈퍼히어로, 근대의 흔적들
올해로 13회째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10월2~10일)의 야심은 이미 알려진 영화의 영토들이 아니라, 세계 영화지도에서 점점 중요한 위치로 자리잡아가는 아시아 영화들, 그 가운데서도 중앙아시아와 동남아 등지의 영화들을 발굴하는 것이다. 그렇게 선정된 영화들 중 개막작 <스탈린의 선물>(루스템 압드라셰프)은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의 작은 마을에 모인 소수민족들의 삶에 대한 감동적인 드라마로,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지역 영화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시아 영화의 창’에서는 그 밖에도 차기작 소식이 궁금했던 감독들의 작품들이 포진돼 있다. 필리핀 감독인 브리얀테 멘도사의 <서비스>, 아버지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쓴 시나리오를 연출한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두 발로 걷는 말>, 몇 해 전 부산영화제에서 상영한 <내 곁에 있어줘>로 관객의 심금을 울렸던 에릭 쿠의 <마이 매직>, <아무도 모른다>로 수많은 한국 팬들을 얻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 지난해 부산영화제에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로 <881>이라는 뮤지컬을 상영한 뒤 올해에도 또 다른 뮤지컬을 들고 온 로이스톤 탄의 <12연화>까지 쟁쟁하다.
이미 검증된 영화들보다는 수면 아래에 묻혀 있던 영화들을 새로운 맥락에서 다시 읽어보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섹션은 단연 ‘아시아의 슈퍼 히어로’다. 슈퍼맨, 배트맨, 아이언맨, 헐크 등 미국의 우람한 영웅들에게만 익숙한 우리에게 일본과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말레이시아 등지의 슈퍼 히어로들은 왠지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슈퍼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는 장르가 언제나 미국의 사회·정치·문화적 맥락과 분리될 수 없는, 지극히 정치적인 오락물임을 감안한다면, 아시아 등지에서 날아온 슈퍼 히어로는 각국의 시대와 문화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진다. 아시아의 토종 슈퍼 히어로의 계보를 그려보는 동시에 아시아 각국 근대화의 흔적을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다.
한편 괜한 모험을 두려워하는 관객이라면 거장들의 신작으로 꽉 찬 ‘월드 시네마’의 목록을 꼼꼼히 둘러볼 일이다. 이를테면 누벨바그 이래 프랑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는 아르노 데스플레생의 <크리스마스 이야기>, 오즈 야스지로의 <만춘>에 대한 오마주이자 유럽식 리메이크라고 할 수 있을 클레어 드니의 <35럼>, 한국에서도 특별전을 통해 알려진 초현실주의의 대가 라울 루이즈의 <누신젠 하우스>, <야경>에 이은 렘브란트 탐구작인 피터 그리너웨이의 <렘브란트의 심판> 등이 그렇다. <약속>부터 <더 차일드>까지 인물을 상황의 끝까지 밀고 나아간 뒤 결국 선택 혹은 결단을 감행하게 만드는 독한 형제 감독, 장 피에르 다르덴과 뤽 다르덴의 <로나의 침묵>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영화는 세계 4대 영화제 소식을 먼발치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관객에게는 최상의 위로가 될 작품들임이 틀림없다. 덧붙여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으며 늦은 밤 야외 상영관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오픈 시네마’)도 놓치지 마시길. 오시이 마모루의 <스카이 크롤러>와 2008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로랑 테의 <더 클래스>가 상영된다.
김기영 10주기, 복원된 <하녀> 상영 그렇다면 한국 영화들은 어디에 숨었을까? <자유부인>으로 당대 여인들의 마음을 뒤흔든 한형모 감독의 작품들을 돌아보고 김기영 감독 10주기를 추모하며 디지털로 복원된 <하녀>를 상영하는 ‘한국 영화 회고전’이다. 전수일 감독의 <바람이 머무는 곳, 히말라야>에는 오랜만에 보는 배우 최민식이 출연하며, 여성 신인 감독의 등장을 목말라 기다렸던 관객에게는 이경미(<미쓰 홍당무>)와 부지영(<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등장이 반가울 것이다. 또한 ‘한국 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선 독립영화계의 스타(?) 감독들(양익준, 손영성, 안슬기)의 새 장편들을 통해 무궁무진한 그들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돼 있다. 영화제의 규모에 비해 너무도 간단한 소개를 마쳤으나,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사실은 알고 있다. 부산 해운대의 모래를 밟는 순간부터 더 이상 누군가의 설명도, 제안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라는 것을. 백문이 불여일견! 남다은 영화평론가
13회 부산영화제에서 상영될 화제의 출품작들. 맨 위부터 <로나의 침묵>, <스탈린의 선물>, ‘아시아의 슈퍼히어로’ 섹션 <캡틴 바벨>의 한 장면.
김기영 10주기, 복원된 <하녀> 상영 그렇다면 한국 영화들은 어디에 숨었을까? <자유부인>으로 당대 여인들의 마음을 뒤흔든 한형모 감독의 작품들을 돌아보고 김기영 감독 10주기를 추모하며 디지털로 복원된 <하녀>를 상영하는 ‘한국 영화 회고전’이다. 전수일 감독의 <바람이 머무는 곳, 히말라야>에는 오랜만에 보는 배우 최민식이 출연하며, 여성 신인 감독의 등장을 목말라 기다렸던 관객에게는 이경미(<미쓰 홍당무>)와 부지영(<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의 등장이 반가울 것이다. 또한 ‘한국 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선 독립영화계의 스타(?) 감독들(양익준, 손영성, 안슬기)의 새 장편들을 통해 무궁무진한 그들의 미래를 점쳐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돼 있다. 영화제의 규모에 비해 너무도 간단한 소개를 마쳤으나,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나도 사실은 알고 있다. 부산 해운대의 모래를 밟는 순간부터 더 이상 누군가의 설명도, 제안도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따름이라는 것을. 백문이 불여일견! 남다은 영화평론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