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밤, 한강 위로 뜬 보름달을 보며 친구가 소원을 빌었다. “돈 많이 벌고 벤츠 탄 왕자님 만나게 해주세요.” 다른 친구가 진지하게 지적했다. “좀 구체적으로 말해봐.” 잠시 고민하던 친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음… 벤츠를 소유한 왕자님 만나게 해주세요. 직업은 회사원. 착하고, 외모는 별로 상관없고, 덩치만 나보다 크면 되고….” 어설픈 신데렐라 지망생의 소원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왕자님도 뭘 좀 알아야 만나든 잡든 할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이 드라마를 소개해주었다.
SBS <유리의 성>의 정민주(윤소이)는 그야말로 ‘신데렐라의 정석’으로 보고 배울 만한 인재다. 신참 아나운서인 그녀는 뉴스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달리던 중 하필 국내 굴지의 대기업 후계자인 김준성(이진욱)의 차와 부딪히고, 병원비 내놓으라는 실랑이 한 번 없이 쌩하니 가버리는 대신 자기 연락처가 적힌 다이어리를 떨어뜨리는데, 마침 다이어리에는 “민주야, 오늘 하루 힘들었지? 그렇지만 잘 견뎠어. JBC에 들어오려고 니가 고생한 시간들을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잖아. 잘했어, 정민주. 계속 그렇게 파이팅하는 거야. 아자!”라는 미니홈피 전체 공개용 일기가 적혀 있고, 당연히 김준성은 그 일기를 읽는다.
모처럼의 휴일에 자전거를 타고 가다 상대편 과실로 정면 충돌한 상대가 아버지뻘의 남자인데 연락처는 받았으나 병원비 달라기엔 미안한 행색이라 그냥 내 돈으로 엑스레이 찍고 약 사 먹는 처지로선 재벌 2세와의 접촉사고라면 차에 뛰어들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OOO 매니저 연락두절, 미치겠음”이라든가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세상아 무너져버려라!” 따위 내용밖에 안 적혀 있는 내 다이어리라면 재벌 2세가 주워간대도 저택 서재의 벽난로에 처넣어질 뿐이겠지만.
그런데 정민주의 운, 혹은 능력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친구가 옷까지 빌려다주면서 억지로 끌고 간’ 파티에서 재회한 김준성은 실수로 그녀의 옷에 와인을 엎지른다. “세탁비를 드릴까요? 아니면 옷값을 변상할까요?”라며 수표를 꺼내드는 상대에게 평범한 여자라면 “영수증 보낼 연락처 주세요”라고 하겠지만 우리의 정민주는 그를 향해 와인을 끼얹으며 “이렇게 되면 피차 변상해야 되는데 그냥 퉁치죠!”라고 선언하는 대범함을 보인다. 실제 상황이라면 아버님 되시는 회장님께서 몸소 경호원들을 데리고 찾아와 단매를 치실 법도 한데, 드라마 속 재벌 2세는 오히려 끈질긴 구애 작전을 펼치며 말한다. “화내는 게 어울리는 여자는 처음이에요.”
이는 한때 인터넷을 강타했던 ‘재벌 2세와 결혼하는 법’ 시리즈에서도 소개되었던 법칙이다. 다짜고짜 남자에게 다가가 따귀를 올려붙이면 그는 “나에게 이러는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라며 무릎을 꿇게 되어 있다고. 수학 교과서에서 수십 년째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가르치듯 드라마에서는 이 쉽고 간단한 신데렐라의 공식을 십수 년째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거의 평생을 그렇게 배워온 내가, 심지어 재벌 2세 아니라 대통령 앞에서도 화낼 만반의 태세를 갖춘 내가 왕자님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보름달을 보며 빈 소원이 “이번주 인터뷰 펑크 나지 않게 해주세요”였던 게 실수이려나.
최지은 〈매거진t〉기자
<유리의 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