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창 꺾은 한국테니스 대들보… ATP 투어급 코치진 등 체계적 지원 절실
2001년 여름의 문턱에서 한국테니스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선수가 있다. 바로 이형택이다. 그는 26일(한국시각)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열린 세계남자프로테니스협회 (ATP) 투어 베리즌 애틀랜타챌린지대회(총상금 40만달러) 단식 2회전에서 이 대회 와일드카드를 쥐고 3번 시드로 나온 ‘코트의 여우’ 마이클 창(29·미국)을 맞아 한 차원 높은 두뇌플레이를 펼치며 2-0(6:4/7:6<7:3>)의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이형택과 마이클 창의 승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스트로크의 싸움이었다. 첫 세트는 창의 주특기인 포핸드로 돌아서 치는 것을 이형택이 백핸드로 직선공격을 한 것이 먹혀들어갔다. 코트 가운데에서 몸이 한쪽으로 치우친 창은 자신의 포핸드쪽 사이드라인으로 넘어오는 공을 번번이 지켜봐야만 했다.
코트의 여우에 맞서 완벽한 승리 일궈
두 번째 세트에서는 백전노장 창의 플레이가 살아나서 이형택이 2-4로 몰리는 상황이 됐다. 이때 이형택은 1세트와는 달리 포핸드로 돌아서 치는 자신의 장기를 구사해 고비 때마다 득점으로 연결했다. 결국 한발 빠른 공격 템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경기운영 능력으로 2-4로 밀리는 상황을 뒤집고 승리의 여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형택이 마이클 창과 공식적인 시합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홍콩 셀렘오픈 때의 연습경기에서 이겼던 경험은 이번 시합에서 귀중한 자심감이 되었다.
이번 이형택이 상대한 마이클 창은 99년 이후 규모있는 대회에서 한 번밖에 우승을 하지 못해 ‘지는 해’라고 여겨진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란 말이 있지 않던가. 지난 89년 당시 17살이라는 약관의 나이로 프랑스오픈에서 최연소 우승을 하며 세계무대에 등장한 뒤, 96년에는 호주오픈과 US오픈 준우승으로 세계 2위까지 올랐던 스타가 바로 마이클 창이다. 일단 코트에 서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기 때문에 프로테니스 선수세계에서 기피 대상으로 꼽히는 선수가 바로 마이클 창이다. 서비스 에이스가 있거나 강한 스트로크가 있는 선수는 아니지만 수비범위가 다른 프로선수보다 좌우 양쪽으로 30cm 이상 넓고, 어떻게 해서든지 끝까지 걷어올리는 창에게 어느 누구도 쉽게 이기질 못한다.
그런 마이클 창을 ‘한국테니스의 대들보’ 이형택이 꺾은 것이다. 비록 8강에서 왼손잡이 유럽선수인 스테판 쿠벡(오스트리아·94위)을 만나 1-2로 져 4강 고비를 넘어서진 못했지만, 이형택이 이번 마이클 창과의 대결에서 거둔 승리는 단순한 1승 이상의 큰 의미를 가진다.
올 1월 호주오픈에서 니콜라스 라펜티, 2월 사이베이스오픈에서 세계 1위 안드레 애거시 등 정상급 선수들과 대등한 경기를 펼친 끝에 못내 아쉬운 패배를 맛보았던 이형택으로서는 이에 버금가는 스타플레이어 마이클 창을 누름으로써 세계무대에 자신을 알릴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한국적 테니스 토양에서 벌떡 일어선 이형택이기에 더욱 값진 수확이다. 이렇듯 한국테니스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이형택은 어떤 선수일까. 1976년 1월3일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우항리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라켓을 잡기 시작한 이형택은 춘천 봉의고 2학년 때 당시 한국테니스 선두주자 송형근을 물리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뒤 국내 각종대회 우승을 바탕으로 대학 2학년이던 1995년 9월, 윤용일과 함께 삼성물산(현재는 삼성증권 소속)과 후원계약을 체결하고 프로선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세계 프로무대의 벽이 그리 낮은 것만은 아니었다.
96년 한때 세계순위 260위까지 오르며 100위권 진입의 꿈을 달성하리라 보았지만 97년 말에는 순위가 333위까지 하락하더니 급기야 98년에는 400위권으로 떨어져 세계 100위권 진입의 꿈이 한없이 멀어만 보였다. 그러나 대학졸업 뒤 98년 한국 국제 남자 퓨처스대회 1, 2차대회에서 우승하며 잃었던 자신감을 되찾았다. 선수로서 하나 더 넘어야 할 산인 병역문제도 98년 방콕아시안게임 남자 단체전 우승으로 해결했다. 그뒤로 국내대회는 물론 외국대회에서도 상승분위기는 이어졌다.
철저한 자기관리로 세계 79위에 올라
지난해 US오픈 당시, 세계순위 180위권이던 그는 예선 1, 2, 3회전을 통과하고 본선에서 세계 10∼60위권의 강호들을 차례로 물리치며 16강에 진출했다. 16강전에서 이형택은 세계의 강자, 피트 샘프라스와 대등한 경기를 펼치며 국제무대에 파란을 일으켰다. 이는 당시 US오픈 TV 해설자 존 매켄로의 “한국 선수가 뛰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는 별 볼일 없다는 투의 해설을 무색하게 만든 쾌거였다.
이형택은 한국테니스의 오랜 염원인 ‘그랜드슬램 3회전 진출’을 이루어냈다. 82년 이덕희(48·현 미국LA 가든스위츠호텔 대표) 선수가 US여자오픈 16강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다. 그뒤 한국테니스는 2회전의 문턱을 한번도 넘지 못했다. 남자보다 세계 정상권에 오르기가 더 유리하다고 집중 육성했던 한국여자 테니스의 간판 스타 박성희도 그랜드슬램 3회전 진출의 꿈을 이루지 못한 터였다. 그러나 이형택은 그동안 국내 남자 선수가 한번도 넘어보지 못했던 세계순위 100위권을 돌파하더니 마침내 79위까지 올라서는 등 착실하게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고 있다.
한국테니스 역사의 새 장을 펼친 이형택의 강점은 체력을 바탕으로 하는 포핸드, 백핸드 스트로크 플레이와 경기에 대한 강한 집중력이다. 비록 서비스에서는 힘이 실리지 않아 강호들에게 뒤지지만 상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투지가 탁월하다. 이형택은 최근 남자테니스의 강력한 서브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서브할 때 라켓을 뿌려주는 맛이 있어야 공에 힘이 실리는데 고등학교 때 다친 어깨 때문에 그렇게 하질 못한다. 하지만 그는 이런 자신의 약점을 철저한 자기관리로 보완하고 있다. 몸이 재산인 프로 선수들에게 철저한 자기관리란 무척이나 인내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술도 곧잘할 것 같은 힘있는 외모를 지녔지만 맥주 한잔도 마시지 않는다.
외국 투어 때나 국내 시합에 출전할 때나 항상 그의 가방에는 줄넘기와 3kg짜리 아령이 들어 있다. 경기 이외의 시간에 틈날 때마다 그는 양손에 든 아령을 들어올리거나 줄넘기를 하면서 체력보강에 힘쓴다. 투어급 대회에 다니는 세계 정상의 선수들이 시합 뒤에 웨이트 트레이닝과 스트레칭을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운 결과다.
“수년 내 그랜드슬램 결승에 오르겠다”
이토록 철저한 자기관리로 여기까지 온 이형택에게는 본격적으로 ATP 투어 무대로 발길을 돌린 이제부터가 어려운 승부다. ATP 투어급 선수에 걸맞은 코치진의 구성도 절실히 필요한 때다. 이제는 이형택 개인의 노력에만 모든 것을 맡길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감각을 지닌 팀 차원의 지원이 요구된다.
올 1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하이네켄대회 예선 탈락, 호주오픈대회 예선 탈락에서 보았듯이 세계대회의 1회전 통과란 결코 녹록지 않다. 세계무대에 만만한 상대란 없기 때문이다. 껄끄러운 상대로 여기는 왼손잡이 혹은 힘좋은 유럽쪽 선수를 피할 재간도 없다. 이제 5월 말 있을 프랑스 오픈에 몸을 맞추고 있는 이형택의 목표는 9월 안에 세계순위 50위권에 진입하고 1∼2년 내에 그랜드슬램대회 결승진출을 바라보는 것이다. 정글과도 같은 남자 프로테니스 세계에서 25살의 청년 이형택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지켜볼 일이다.
박원식 기자/ 한겨레 스포츠레저부 pwseek@hani.co.kr

사진/ 한국테니스의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이형택. 그는 타고난 체력을 바탕으로 경기에 강한 집중력을 보이고 있다.(사진공동취재단)
두 번째 세트에서는 백전노장 창의 플레이가 살아나서 이형택이 2-4로 몰리는 상황이 됐다. 이때 이형택은 1세트와는 달리 포핸드로 돌아서 치는 자신의 장기를 구사해 고비 때마다 득점으로 연결했다. 결국 한발 빠른 공격 템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경기운영 능력으로 2-4로 밀리는 상황을 뒤집고 승리의 여신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이형택이 마이클 창과 공식적인 시합을 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홍콩 셀렘오픈 때의 연습경기에서 이겼던 경험은 이번 시합에서 귀중한 자심감이 되었다.

사진/ 이형택은 한국남자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3회전에 진출했다. 16강에 오른 뒤 귀국한 이형택.(윤운식 기자)

사진/ US오픈 테니스 대회에서 접전을 치른 피트 샘프라스와 악수하는 모습.(AP연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