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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차라리 추첨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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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5-0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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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번의 깊은 실망 ‘대종상 시상’, 예고된 불안한 동거의 결과

사진/ <하루>는 감독상, 심사위원 특별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등 대종상 주요 4개 부문을 휩쓸었다.
차라리 추첨이 낫지 않았을까? 4월25일 제38회 대종상 시상식 결과를 본 뒤 바로 든 생각이었다. 추첨은 완전한 승자를 뽑는 것도 아니며 패자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지도 않는다. 또한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관객에게 불쾌 혹은 분노를 선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네티즌들의 비판과 비방과 욕설이 난무하고 이런저런 떠도는 소문을 듣는 것조차 이젠 지겹다. 여하튼 이번 수상결과는 영화인협회와 영화인회의 즉 한국영화계의 신구 세대가 일시적으로 화합된 모습을 보이는 데 들어간 비용치고는 너무나 큰 비용을 치른 것이었다. 그 비용이란 바로 한국영화계 전체에 대한 ‘또 한번의 깊은 실망’이었다.

독립영화를 껌처럼 여기다

투표권이 없는 심사위원장과 영화인협회쪽의 추천인 4명과 영화인회의 추천인 4명 그리고 이 행사를 중계한 SBS쪽 1인 등 총 10인으로 구성된 심사위원회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구도였다. 하지만 화합이라는 명분에만 집착하여 ‘열패감과 불신과 아집’이라는 악수를 둔 뒤 ‘적절하지 못한 규정’까지 준수하는 비현실적 감각까지 발휘한 수상결과를 낳았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납득하는 심사결과란 없다. 심사위원회는 그 사회의 성격과 수준만큼 현실적 안배와 인간적 고려를 할 수밖에 없다. 또 편이 갈려서 완강한 격론이 벌어지면 제3의 영화가 어부지리로 상을 받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부정적인 측면들은 51% 이상의 공정함과 납득할 수 있는 정치적 배려가 있기 때문에 용납되는 것이다.


사진/ 영화인협회와 영화인 회의는 ‘공정성’을 강조했지만 이제 관객으로부터 신뢰받기 힘들게 됐다. 남우주연상과 여우주연상을 탄 송강호와 고소영.(정진환 기자)
<하루>(한지승 감독)가 심사위원 특별상과 감독상 그리고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 등 4개 상을 받은 것은 적절치 못한 규정을 수용한 심사위원들의 비현실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물론 나는 고소영씨가 여우주연상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단지 하품을 했을 뿐이다). <친구>가 하나의 상도 받지 못한 것은 이 영화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거부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나는 적어도 심사위원의 자격에는 전문적 안목과 더불어 자신의 취향을 최대한 자제할 줄 아는 겸손함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 홍상수의 <오! 수정>이 무조건 탈락된 것을 보고는, 심사위원들 대다수가 매체에 대한 미적 인식과 지지해야 할 대상에 대한 한 정치적 안목 모두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라는 기우를 하기도 했다. 정확한 실수 하나. 기획상을 받은 <인터뷰>(변혁 감독)의 기획자는 씨네2000(대표 이춘연)의 이미영씨가 아니라 최근에 독립하여 막 <수취인불명>(김기덕 감독)의 제작을 끝마친 이승재씨라는 사실이다. 또 있다.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 부문을 신설한 것은 극영화 부문뿐만 아니라 전체 영화계를 끌어안고자 하는 의도”라고 말한 이춘연 영화인회의 이사장의 의도는 결코 시상식에서 적용되지 않았다. 다른 수상자들의 불필요할 정도의 잡담과는 대조적으로 애니메이션 수상자에게는 소감발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립영화를 껌처럼 여긴 것이다.

타협과 맹목의 조화?

올해 대종상은 영화인협회와 영화인회의가 공동으로 집행위원회를 꾸린 아름다운 풍경으로부터 출발했다. 그들은 입을 모아 ‘공정성’을 강조했다. 또 심사위원장인 정진우 감독 역시 “심사결과에 영화인 모두가 승복할 수 있도록 힘쓸 것”이라고 공정성을 강조했다. 올해 대종상의 주제는 ‘화합’과 ‘공정성’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관객은 영화인들의 화합 따위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어떤 화합? 아무리 공정하게 인원을 배치하고 규정을 준수한들 그 화합이 ‘패기와 성숙의 조화’가 아니라 ‘타협과 맹목의 조화’처럼 보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영화인회의와 영화인협회가 대종상을 같이 꾸려나가기로 작정하는 순간에 이런 수상결과는 예상된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인회의의 정신적 뿌리가 1987년 전두환 정권 치하에서 위험한 정치적 성명서를 냈던 그 ‘초심’에 있었다는 것을 인지했더라면 이런 악수는 쉽게 행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효인/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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