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가까운 실험적인 미술, 각종 신흥종교의 발원지를 찬찬히 조명한 <신도안>을 만든 박찬경 작가
▣ 글 김경욱 기자dash@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신도안. 현재 충남 계룡시 남선면 일대인 이곳은 국내 전통 민속종교의 오랜 성역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앞서 조선의 새 도읍지로 삼으려고 했던 곳이며,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가 조선왕조가 망한 뒤 정씨 성 가진 이가 새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한 지역이기도 하다. 닭이 알을 품듯, 계룡산이 신도안 사방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지세 때문에 예로부터 대표적 명당으로 손꼽혔다.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를 비롯해 시천교, 대종교, 증산교 등의 전통종교단체는 이곳을 이상사회의 중심지로 여겼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식민지시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신도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수백여 개의 다양한 종교단체들이 생겨나고 번성하면서 신도안은 각종 전통·신흥 종교의 발원지가 됐다. 그러나 1968년 박정희 정권이 계룡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육해공 삼군통합본부인 계룡대를 설치하면서, 대부분의 종교시설은 철거됐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8월17일까지 열리는 작가 박찬경(43)씨의 개인전 ‘신도안’(02-3015-3248)은 이 신도안 공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영상 보고서다. 그의 45분짜리 다큐 영화와 기록사진, 건축모형들은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억압되어온 신도안이라는 공간을 찬찬히 재조명한다. 현대인들이 미신과 사이비 종교로 폐기처분했던 계룡산 문화를 다시 살피면서 작가는 우리 내부의 왜곡된 근대적 시각에 도발적 의문을 제기한다. 그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왜 신도안을 소재로 삼았나. 전작에서는 미디어가 이땅의 냉전·분단에 대한 정보나 사람들의 기억에 어떻게 개입하고 관여했는지 살펴보는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가령 70년대 땅굴이 발견됐을 때 대한뉴스 등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는 일 따위다. 분단은 오랜시간 억압된 기억이다. 그런데 <쉬리> 〈JSA〉 <웰컴투 동막골>처럼 이 억압된 기억을 소재로 한 영화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분단보다 더 뿌리 깊이 억압된 기억을 찾아나서게 된 거다. 그것이 종교가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우연히 신도안 기록사진을 접하고는 ‘이거다’ 싶었다. 미술인인데, 왜 영화 작업을 택했나. 일단 관심이 많다. 형도 영화를 하고 있고(그의 형은 〈JSA〉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다). 2005년 만든 <비행>이란 작품이 지난해 독일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 이번처럼 정식 스태프와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영상을 재편집한 작품이었는데, 영화제를 통해 많은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꼈다. 사실 미술만 하면 관객이 제한된다.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대부분이고(웃음). 영화는 다르다. 관객 한계를 벗어날 수 있고, DVD로 편하게 배급할 수도 있다. 꼭 미술관에서만 전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미술에 가까운 실험적 영화가 있듯, 영화에 가까운 실험적 미술도 많이 생겨날 필요가 있다. 근대화의 눈으로는 이른바 미신이나 사교로 치부돼온 것에 눈을 돌렸다.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미신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정감록> <격암유록>의 세계관이나 동학, 정역, 영가무도 등은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눈이었다. 이것이 미신이고 사교라면 ‘일 년 반 뒤면 사탄의 무리들이 떠나 정권이 안정된다’거나 ‘촛불이 사탄’이란 이야기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거야 말로 미신 아닌가. 전통종교는 소박하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종교였다. 지금 신도안의 모습은 어떤가. 서울 강남 같다.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완벽한 도시가 됐다. 과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신도안을 둘러싼 산 지역에 수많은 무속인들이 자리 잡았을 뿐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천도교, 시천교, 대종교, 증산교 등의 전통종교와 무속의 구분이 필요할 것 같다.
전통종교는 굿이나 신점을 보는 무속과는 다르다. 무속인들의 화려한 옷이나, 칼이나 부채 같은 도구가 없다. 이들에게는 교리와 교주가 있고 세계를 설명하는 철학이 있다. 주문도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주문은 기도문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문이라고 하면 미신과 사교를 생각하고, 기도문이라면 세련된 종교를 떠올린다. 근대화의 그릇된 산물이다. 재미있게도 현대인들은 전통종교나 무속을 미신이라 억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받아들이고 있다. 아직 버리지 못하는 거다. 그러니까 정치가들이 때마다 점 보러 다니고 부모들 묏자리를 바꾸고 하는 거다.
다양한 종교가 신도안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다.
70년대만 해도 80여개 이상의 종교단체가 있었다고 한다. 신도안이 고향인 사람들이 전시장에 온 적이 있다. 사진을 보면서 여기에 우리 집이 있었다며 그리워하더라. 그 분들에게 물어보니 신도안에서는 각각의 종교들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부딪침 없이 잘 지냈다고 하더라.
영화 프레임이 힘이 있다. 잔기교가 없이 우직하게 밀고나간다. 화면이 ‘나는 이대로 가. 너는 보기 싫으면 말아’라고 하는 것 같다. 그 힘이 무섭게 느껴지면서도 뭐가 나올까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돈이 없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잔기교를 쓰기에는 너무 벅찬 것 같아 어쩔 수 없었던 측면이 많다. 물론 화면과 컷과 컷의 흐름 등 기존 영화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 조금 부담스럽게 느낄 수도 있다.
박찬욱 감독이 작품을 봤는가.
재미있다고 하더라. 형이 많이 도와줬다. 영화작업은 처음이어서 포스트 프로덕션과정의 CG(컴퓨터 그래픽)나 DI(디지털 이미지), 음악작업 등에서 도움을 받았다. 특히 형이 카메라 빌리는 것을 적극 도와줘 제작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웃음).
형은 상업예술, 동생은 순수예술을 하다보면 부딪치는 지점은 없나.
없다. 형은 상업영화지만 작가주의를 추구한다. 웬만한 예술보다 더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중간예술을 추구한다. 도움을 많이 받는다.
영화를 계속 하고 싶나.
하고 싶다. 문제는 돈이다. 상업적으로 돈 될 수 없는 작품을 하는 것이니 누가 주지 않으면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번 작품은 패션기업 에르메스의 지원을 받아서(그는 2004년 에르메스 코리아 미술상 수상작가다) 할 수 있었다. 행운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조선시대 판타지를 해보고 싶다. 판타지 다큐라고 하면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없겠지만, 홍대용이나 박지원과 같은 18세기 실학자들이 어떤 세계를 그렸는지를 다뤄보고 싶다. 그들은 동양적 세계관인 주역에 정통하면서 서구의 천체지식을 바탕으로 한 세계관을 받아들인 사람이다. 궁금하지 않은가. 왜 영화하는 사람들이 이런 걸 안 하지?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박찬경 작가는 ‘신도안’을 통해 미신과 사이비 종교로 폐기처분했던 계룡산 문화를 조명하면서 우리 내부의 왜곡된 근대적 시각에 도발적 의문을 제기한다.
신도안. 현재 충남 계룡시 남선면 일대인 이곳은 국내 전통 민속종교의 오랜 성역이다.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에 앞서 조선의 새 도읍지로 삼으려고 했던 곳이며, 예언서 <정감록>의 저자가 조선왕조가 망한 뒤 정씨 성 가진 이가 새 나라를 세울 것이라고 예언한 지역이기도 하다. 닭이 알을 품듯, 계룡산이 신도안 사방을 포근하게 감싸 안은 지세 때문에 예로부터 대표적 명당으로 손꼽혔다.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를 비롯해 시천교, 대종교, 증산교 등의 전통종교단체는 이곳을 이상사회의 중심지로 여겼다.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나 식민지시대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신도안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수백여 개의 다양한 종교단체들이 생겨나고 번성하면서 신도안은 각종 전통·신흥 종교의 발원지가 됐다. 그러나 1968년 박정희 정권이 계룡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고, 1984년 전두환 정권이 육해공 삼군통합본부인 계룡대를 설치하면서, 대부분의 종교시설은 철거됐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아틀리에 에르메스에서 8월17일까지 열리는 작가 박찬경(43)씨의 개인전 ‘신도안’(02-3015-3248)은 이 신도안 공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영상 보고서다. 그의 45분짜리 다큐 영화와 기록사진, 건축모형들은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 강점기와 근현대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억압되어온 신도안이라는 공간을 찬찬히 재조명한다. 현대인들이 미신과 사이비 종교로 폐기처분했던 계룡산 문화를 다시 살피면서 작가는 우리 내부의 왜곡된 근대적 시각에 도발적 의문을 제기한다. 그를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왜 신도안을 소재로 삼았나. 전작에서는 미디어가 이땅의 냉전·분단에 대한 정보나 사람들의 기억에 어떻게 개입하고 관여했는지 살펴보는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가령 70년대 땅굴이 발견됐을 때 대한뉴스 등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를 살펴보는 일 따위다. 분단은 오랜시간 억압된 기억이다. 그런데 <쉬리> 〈JSA〉 <웰컴투 동막골>처럼 이 억압된 기억을 소재로 한 영화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을 보면서 분단보다 더 뿌리 깊이 억압된 기억을 찾아나서게 된 거다. 그것이 종교가 아닐까 생각하던 차에 우연히 신도안 기록사진을 접하고는 ‘이거다’ 싶었다. 미술인인데, 왜 영화 작업을 택했나. 일단 관심이 많다. 형도 영화를 하고 있고(그의 형은 〈JSA〉 <올드보이>의 박찬욱 감독이다). 2005년 만든 <비행>이란 작품이 지난해 독일 오버하우젠 단편영화제에 초청된 적이 있다. 이번처럼 정식 스태프와 작업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영상을 재편집한 작품이었는데, 영화제를 통해 많은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다는 데 매력을 느꼈다. 사실 미술만 하면 관객이 제한된다.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대부분이고(웃음). 영화는 다르다. 관객 한계를 벗어날 수 있고, DVD로 편하게 배급할 수도 있다. 꼭 미술관에서만 전시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미술에 가까운 실험적 영화가 있듯, 영화에 가까운 실험적 미술도 많이 생겨날 필요가 있다. 근대화의 눈으로는 이른바 미신이나 사교로 치부돼온 것에 눈을 돌렸다.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미신이 아니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정감록> <격암유록>의 세계관이나 동학, 정역, 영가무도 등은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눈이었다. 이것이 미신이고 사교라면 ‘일 년 반 뒤면 사탄의 무리들이 떠나 정권이 안정된다’거나 ‘촛불이 사탄’이란 이야기는 뭐라고 해야 하나. 그거야 말로 미신 아닌가. 전통종교는 소박하면서도 가장 한국적인 종교였다. 지금 신도안의 모습은 어떤가. 서울 강남 같다. 계룡대가 들어서면서 완벽한 도시가 됐다. 과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신도안을 둘러싼 산 지역에 수많은 무속인들이 자리 잡았을 뿐이다.
<신도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