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 사파티스타 마르코스 부사령관이 펴낸 설화집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검은 스키마스크와 파이프담배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종종 체 게바라와 비견된다. 체 게바라처럼 그 역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43). 대학에서 석사까지 교육받은 그는 얼마든지 사회지배계층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멕시코로 돌아와 치아파스주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그의 갈 길은 바뀐다. 치아파스는 멕시코에서 여덟 번째로 큰 주로, 넓이에 걸맞게 자원이 풍요롭다. 그러나 석유와 천연가스까지 나오는 풍요로운 땅에 걸맞지 않게 주 인구의 54%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지켜본 스물여섯살 청년 마르코스는 라칸돈 정글의 게릴라가 되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부사령관 자리에 올랐다.
한손에는 총, 한손에는 노트북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창궐하는 21세기에, 그는 아직도 혁명가로 버젓이 존재한다. 그뿐만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한손에는 총, 한손에는 노트북 컴퓨터라는 색다른 무기를 들고 멕시코 정부와, 더 나아가서 세계화와 싸우고 있다. 마르코스는 에세이, 편지, 연설문, 성명서, 심지어 시나리오까지 써서 인터넷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한편 1996년에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대륙간 회담을 제의하기도 했다. 일찍이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그 문학성에 찬사를 보낸 바 있는 이 혁명가가 이번에 들고 나선 무기는 설화다.
다빈치에서 출간된 설화집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마르코스 지음·박정훈 옮김)는 그런 의미에서 신선하다. 원래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사파티스타가 멕시코 농민들에게 나눠주던 팸플릿에 실린 것이다. 마르코스는 농민들에게 혁명 이데올로기를 쉽게 전파하기 위해 설화와 우화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지어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라는 원주민과 그에 비해 풋내기로 세상을 배워나가는 마르코스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마야인의 교훈을 전하는 원주민의 상징이다. 그는 밀림에 세운 도시를 포함하여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명을 누렸던 사람들의 지혜를 우화형식으로 전한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세상이 어떻게 처음 열렸는가,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설화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설화들은 왜 혁명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혁명을 해야 하는가와 연결된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금인간, 나무인간, 그리고 참된 인간인 옥수수 인간으로 나뉜다. 이 점은 옥수수가 멕시코의 주식임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금인간은 부자들이고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고, 나무인간은 가난하고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진실한 인간인 옥수수 인간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가장 위대한 창세신과, 나중에 나타난 신들로 나뉘는데, 모두들 마치 인간처럼 학습하고, 토론하고, 질문한다. 참된 인간은 신들과 함께 세상을 더 낫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왜 ‘검은색’ 마스크를 썼을까
마르코스에게 지혜를 전하는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차가운 빗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조용히 담뱃불을 붙이고 뚜벅뚜벅 길을 만드는 그런 인물이다. 그의 통찰력은 예리하고 정확하다. 심지어 ‘옮긴이의 말’에서조차 그는 문화적 다원성의 중요함을 지적한다. 옮긴이 박정훈은 “제가 할아버지의 얘기를 어떻게 한국어로 옮기지요?”라고 질문한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신들이 세상을 만들었을 때 다채로운 말들도 만들었다네. 지금은 세상이 창조되던 때보다 말의 가짓수가 엄청나게 줄었다네. 사람들은 말이 사라진다는 것은 호기심이 사라진다는 것, 하나의 세상이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네”라고 답한다. 번역을 잘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을 언어의 다원성 문제로 변화시켜버린 것이다. 이처럼 현명한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누구인가? 이 책에서 그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모든 거점에 드나들 수 있으며, 그가 원하는 곳이면 누구도 감히 그의 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역자도 만들어낼 수 있고 마르코스도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사람. 우리는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그는 우리 안에 조용히 웅크리고 있는 사람이다.
마르코스가 선전선동에 얼마나 능한가는 이번 작품집에 실린 해와 달이 생긴 사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한 설화를 통해서 왜 그가 검은색 마스크를 쓸 수밖에 없는가를 말한다. 헤아릴 수 없이 아득히 먼 옛날, 세상에는 물과 밤밖에는 없었다. 추위에 떨던 신들은 누군가가 불을 들고 하늘에 올라가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명의 신이 죽어야 했다. 하얀 신이 하늘에 갔으면 하고 모든 신이 원했으나 결국 자원을 한 것은 까만 신이었다. 까만 신은 가장 못생긴 신으로 ‘익’이라고 불렸다. 익은 하늘에 올라가 해가 되고, 하얀 신은 부끄러운 나머지 달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불붙인 모든 나뭇가지가 하양, 빨강, 노랑, 파랑 등으로 화려하게 빛을 발하다가 다 타고 난 뒤에는 검게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이 탁월한 선전선동가는 1993년 11월17일 있었던 자기들의 현실을 오버랩한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창설 10주년, 장교들은 무엇으로 얼굴을 가릴 것인가를 논의한다. 그들은 탈을 쓸까, 복면을 쓸까 고심하다 스키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기로 정하고, 그 색을 정한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무리를 뚫고 마르코스에게 검은 나뭇가지를 보여준다. “생각나는가?” 그 말 한 마디만을 남기고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사라진다. 그 이후, 사파티스타의 복면은 검은색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스키마스크와 파이프담배는 그의 아이콘이다. 그리고 그 아이콘은 그가 지어낸 설화와 결합해 또다른 담론을 형성한다.
카피레프트 실천… 인세 요구 안해
이 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혁명가가 펼치는 비유는 서글프고도 아름답다. 그는 동지들이 죽을 수도 있는 급박한 상황을 중의적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타다만 나뭇가지는?”/ “그날 밤 모두 불이 되었죠.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에게 안타까워하면서 말한다./ “바로 그런 것이라네.”/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쓸쓸한 목소리로 말한다./ “살기 위해서 죽는 것.” 군사력 면에서 압도적으로 강한 정부군에 시시각각 쫓기는 상황 속에서, 마르코스는 “우리는 살기 위해 죽는다. 하나도 남지 않고 태운다”라고 다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때로 이 책은 잠언을 포함하고 있기도 한다. “내일이라고 부르는 빵을 굽기 위해서는 재료가 아주 많이 들어간다네. 그중 하나가 고통이지.” “색동 앵무새 과카마야가 색깔을 갖게 된 이유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색깔이 다채롭다는 것과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뜻일세.” 이 잠언에서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이 설화집은 독자가 어린이거나 어른이거나 읽을 값어치가 줄지 않는다.
이 책을 번역한 박정훈씨는 “이 글을 한국의 두더지에게 바친다”라고 말한다. 두더지는 나쁜 뜻이 아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에 따르면, 흉포한 사자 앞에서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두더지다. 두더지는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바라본다. 그래서 작은 발로도 유일하게 사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짐승이 두더지라는 것이다.
뒷이야기지만, 마르코스는 이 책의 출간과 관련해서 인세를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단지 기념으로 한국어판 책을 몇권 보내주었으면 하는 것이 바람의 전부다. 그의 행보는 구체적이고, 그의 실천은 철저하다. 이는 마르코스와 그의 친구들이 회의를 통해서 결정한 사항이다. 마르코스는 신자유주의가 옹호하는 배타적 저작권이 선진국에 유리한 제도로서, 주변국을 선진국에 종속시키기 위한 권력구조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반대의사를 표하는 것이다. 그의 행보는 구체적이고, 그의 실천은 철저하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

사진/ 글쓰는 마르코스. 한손엔 총을, 한손엔 노트북을 든 이 인텔리 혁명가는 혁명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설화와 우화를 지어 농민들에게 배포했다.(GAMMA)

다빈치에서 출간된 설화집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마르코스 지음·박정훈 옮김)는 그런 의미에서 신선하다. 원래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사파티스타가 멕시코 농민들에게 나눠주던 팸플릿에 실린 것이다. 마르코스는 농민들에게 혁명 이데올로기를 쉽게 전파하기 위해 설화와 우화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지어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라는 원주민과 그에 비해 풋내기로 세상을 배워나가는 마르코스와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마야인의 교훈을 전하는 원주민의 상징이다. 그는 밀림에 세운 도시를 포함하여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문명을 누렸던 사람들의 지혜를 우화형식으로 전한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세상이 어떻게 처음 열렸는가,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설화를 이야기해준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설화들은 왜 혁명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혁명을 해야 하는가와 연결된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금인간, 나무인간, 그리고 참된 인간인 옥수수 인간으로 나뉜다. 이 점은 옥수수가 멕시코의 주식임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금인간은 부자들이고 흰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고, 나무인간은 가난하고 갈색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고 진실한 인간인 옥수수 인간은 얼굴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리고 신들이 있다. 이 신들은 가장 위대한 창세신과, 나중에 나타난 신들로 나뉘는데, 모두들 마치 인간처럼 학습하고, 토론하고, 질문한다. 참된 인간은 신들과 함께 세상을 더 낫게 만든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이야기들이다. 왜 ‘검은색’ 마스크를 썼을까

사진/ 멕시코인이 그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이 작품집에서 마르코스는 자신들이 왜 검은 마스크를 쓸 수 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한다.

사진/ 작중 인물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색동 앵무새 과카마야가 색깔을 갖게 된 이유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채로운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