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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담징은 금당벽화를 그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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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7-02 00:00 수정 : 2008-11-0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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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벽화 12폭을 나라에서 보다… 전시판과 도록에서 그의 이름은 찾을 수 없는데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1949년 1월26일 불에 탄 호류지 금당벽화 앞에서 당시 주지스님이 참회의 합장을 올리고 있다.

성자와 미녀 그리고 미소년. 인간과 신의 풍모가 오묘하게 조화된 극락세계의 신상들은 벽화 속에서 쉼없이 율동한다. 온화한 표정에 강인한 의지를 머금고서 목과 허리를 세 번 꺾어 몸을 굽혔다. 살집이 만져질 듯 윤기 어리고 탱탱한 몸. 그 위로 꿈틀거리는 손가락이 관객 앞으로 뻗는다. 세상 모든 중생이 깨달음 얻는 그날까지 부처 되는 것을 미루겠다는 맹세를 스스로 말하는 몸. 관음·세지·문수·보현 보살의 자태다. 우아한 귀부인의 얼굴, 건실한 청년의 육체를 지닌 보살들은 섬세한 필선 속에서 해탈의 이상에 골몰한다. 생동하는 정심(精心)의 세계다.

7세기 고구려승 담징의 걸작으로 알려진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 12폭을 대면하는 순간들은 긴장과 희열의 연속이다. 벽화 감상의 황홀경을 절이 있는 일본의 옛 도읍 나라의 국립 나라박물관(www.narahaku.go.jp)에서 누렸다. 6월14일부터 우리에게 친숙한 금당의 보물들을 꺼내어 선보이는 ‘국보호류지금당전’(7월21일까지)이 열린 덕분이다. 금당이 최근 반세기 만에 당분간 내부 대수리에 들어가면서 그 사이 안의 사천왕과 불상, 불상 덮개 장식 등 주요 보물들을 잠시 모셔왔다. 금당에 가도 어둑한 실내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었던 벽화와 불상의 실체를 밝은 조명 아래서 마음껏 볼 수 있었다. 모두 12폭의 벽화는 금당 동서남북 벽면에 각각 붙은 4개 부처의 사방 극락정토도와 8개 보살 그림으로 이뤄진다. 60년 전 비극적 화재로 원래 그림은 크게 손상되고, 1968년 일본의 최고 회화 거장 14명이 1년여간 지고의 노력으로 완성해 금당에 대신 봉납한 정밀 복제화들(불탄 원화는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하지만 생생한 원작의 감동을 떠올리는 감각은 무뎌지지 않았다. 화재 피해를 면한 금당 안 불상 천장벽 부근의 원화 비천상벽화 두 조각도 같이 나와 전시는 더욱 뜻깊었다.


호류지는 우리 민족사와 밀착된 문화유산이다. 6~7세기 백제·고구려 장인들의 영향으로 세계 최고의 목조건물로 꼽히는 금당과 오중탑 등 일본 아스카 시대 건물을 지었으며, 해방 이래 역사 교과서는 금당벽화가 고구려승 담징의 작품으로 전해진다고 기술해왔다. 국어 교과서에 나온 소설가 정한숙의 <금당벽화>를 기억하는 이들도 많다. 소설 속 담징은 수나라와 전쟁 중인 조국을 걱정하다가 승전 소식을 듣고서 벽화를 그린다. 담징의 관음상 그림에 대한 작가의 시구 같은 묘사를 떠올려본다. “거침없는 선이여, 그 위엔 고구려 남아의 의연한 기상이 맺혔고… 목에 걸린 구슬이여, 이는 소식조차 아득한, 조국 땅에 남아 있는, 잊혀지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런가?”

허망하게도 담징의 소설 속 신화는 실체를 찾을 수 없다. 12폭 벽화에 붙인 전시장의 설명판은 물론, 특별전 전시 도록의 논문 어디에도 담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학계는 벽화를 아잔타 석굴 벽화에서 비롯해 서역과 중국 둔황, 윈강석굴, 고구려 등의 조선반도(한반도)를 경유한 동양 불교회화의 정수로 대개 요약한다. 제작자는 밝혀지지 않았다는 중론이다.

이를 두고 일본인들 나름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그 이면에 뒤엎기 어려운 합리적 근거가 존재하며, 100년 이상 묵은 호류지의 재건·비재건 논쟁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에는 7세기 초 고대국가 일본의 기틀을 닦은 쇼토쿠 태자가 호류지를 건립했으나, 원건물은 670년 큰 불에 탔으며 이후 다시 지었다는 내용이 보인다. 논란은 지금 호류지 금당이 정말 새로 지은 것인지 원형인지를 둘러싼 것으로, 벽화가 담징의 작품인지와도 직결된다. 담징은 631년 사망했기 때문에, 재건설이 맞다면 벽화는 담징과 무관해진다. 한·일 미술사가들은 삼국시대 화풍이 벽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대부분 인정하지만, 담징 제작설에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호류지 근방의 발굴 성과와 금당 부재에 대한 연대 측정 결과 때문이다. 1939년 현재 금당이 있는 서원 가람 동남쪽에서 먼저 지어진 백제식의 초창기 절터인 약초가람(와카쿠샤 가람) 터가 발견돼 절을 다시 지었다는 결정적 근거가 성립됐다. 2004년 말에는 원래 절터인 약초가람 안에 그렸다가 불타 무너진 것으로 보이는 채색 벽화 조각들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고열에 변색되거나 그을린 파편들의 발굴로 절이 불탔다는 구체적 증거가 확보된 것이다. 금당 나무 부재의 연대를 정밀 분석해보니 벌채 연대가 650~660년대란 결과도 나왔다. 재건 연대 논란이 사라진 건 아니나, 새 금당 건물을 짓고 벽화를 그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정설로 굳어졌다.

담징의 신화와 실제 벽화 사이의 장막은 언제쯤 온전히 걷어낼 수 있을까. 민족주의 관점만으로는 벽화의 진가를 온전히 보기 어렵다. 금당벽화에는 아잔타 석굴의 연화보살상, 중국 둔황·윈강 석굴의 도상과 닮은 보살상이 적지 않다. 정토도나 보살상 묘사 등은 6~7세기 인도와 동아시아의 국제양식 유행 측면에서 보아야 흐름이 자연스럽다. 벽화의 국제양식은 법수(法水·불법)를 세상 곳곳에 퍼뜨리고 싶다는 당대 불자들의 간절한 염원이 발현된 시각적 산물이다. 금당벽화가 1300여 년 전 당대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숭고한 꽃봉오리라는 사실 자체에 감동할 수는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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