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대한 레퍼토리와 초저가의 양날공격에 음반시장 쑥대밭… 저작권 문제에서도 무풍지대
요즘 음반매장에 가보면 마치 극장에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이미연, 이영애, 김석훈 등 배우들의 대형포스터가 매장을 도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음악판에서 H.O.T나 god보다 잘 나가는 스타는 바로 이들이다. 인기배우가 앨범재킷에 등장하는 대규모 편집음반이 음반시장을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에서 운영하는 대형음반 매장 핫트랙스의 4월 둘쨋주 판매차트에는 이영애의 <애수>(록레코드), 이미연의 <연가>(도레미레코드) 김석훈·장진영의 <러브>(동아기획)가 나란히 3, 4, 5위를 기록하고 있다. <연가>가 지난 1월 중순 발매된 뒤 두달 동안 1위를 기록하며 130만 세트 이상 팔렸고 <애수>가 등장한 지 열흘 만에 23만 세트가 나갔다는 사실을 보면 이들 음반들의 위력은 순위로 감지되는 그 이상이다.
“어떤 제작자가 신인을 육성하겠나”
이 음반들이 시장을 장악한 무기는 방대한 레퍼토리와 정품 음반 가격의 마지노선을 무너뜨린 초저가 가격정책이다. 4∼6장의 CD에 60여 곡에서 100곡 이상 수록한 이 음반들의 가격은 1만5천원에서 2만원 선이다(<연가> 4장 68곡, <러브> 5장 75곡, <애수> 6장 105곡 수록). 평균잡아 한장의 CD에 3천∼4천원 정도이다. 테이프로 따지면 한개에 1500원꼴로 2500원 하는 이른바 리어카 음반보다 훨씬 싼 가격이다.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에서 조성모의 <아시나요>까지 80∼90년대 인기곡을 총망라한 수록곡은 불법음반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은 녹음상태에다 커버버전(원곡과 다른 가수가 다른 반주에 새로 녹음한 노래)이 아니라 원곡 그대로 녹음돼 있다. 때문에 리어카 매장을 애용하던 소비자에게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음반인 셈이다. 대규모 편집음반 바람의 포문을 연 <연가>는 발매 직후 핫트랙스에서만 하루 350세트까지 판매고를 올렸다. 핫트랙스의 가요담당 김은정씨는 “음반매장을 자주 찾지 않는 20대 후반과 30∼40대 고객이 대규모 편집음반의 주소비층이다”라고 말했다. <애수>를 기획한 이가엔터테인먼트의 이도형 대표가 “대규모 편집음반이 저렴한 가격으로 음반매장을 외면했던 청장년층과 불법음반의 소비자들을 흡수할 수 있다”고 한 것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음반계 전체의 불황 속에서 피어난 대규모 편집음반의 성황에 대해 고운 눈길을 보내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음반계 안팎의 관계자들은 “결국 제살 파먹기인 초저가 편집음반의 남발이 가요시장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리고 이런 우려와 원성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초저가 편집음반 바람에 가장 먼저 분통을 떠뜨린 곳은 유통쪽이다. 한국음반유통업협회의 고광춘 총무는 “대규모 편집음반이 전체 음반 유통의 30∼40%까지 장악한 2, 3월, 독집 판매율이 20%가량 떨어졌고 기존의 한두장짜리 편집음반은 완전히 죽었다”면서 “그러나 앞으로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앨범들이 점점 창고에 쌓여가는데 도소매상들은 약정상 제작사에 반품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이라 팔리지도 않는 음반들을 끌어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형유통업체인 미디어 신나라의 유진은 대리 역시 “최근 신보를 낸 한 인기그룹의 경우 그전 음반들에 비해 판매량이 3분의 2가량 줄었다”면서 “반품을 감당하기 힘든 소매상은 아예 독집음반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디어 신나라는 몇몇 대형유통업체들과 함께 5월부터 두장짜리 이상의 편집음반을 유통시키지 않기로 결의했으나 실행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다.
대규모 편집음반 제작사들과 한지붕 아래 있는 음반제작자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다. 소규모 음반사인 틴팬 앨리의 이종성 이사는 “신인가수의 경우 수억원을 들여서 음반을 내도 성공률이 10%가 채 안 된다”며 “그보다 훨씬 낮은 제작비로 실패위험성이 거의 없는 편집음반만 내다보면 어떤 제작자가 과감하게 신인가수 육성을 할 수 있겠냐”고 개탄했다. 연예제작자협회의 권승식 이사 역시 “신곡이 나온 뒤 1년6개월 안에 편집음반이나 리메이크 음반에 쓰지 못하게 하는 저작권협회의 규약조차 지켜지지 않고 마구잡이로 편집음반이 나오는데 누가 돈주고 가수들의 앨범을 사겠냐”고 말하면서 “편집음반 제작은 결국 우리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이라고 지적했다.
자신의 음반이 실린 줄도 모르는 작곡자
대규모의 초저가 편집음반이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소비자들을 “싼맛에 길들이는” 유통질서의 교란뿐이 아니다. 근래 들어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는 저작권 문제에 있어 편집음반은 무풍지대라고 해도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연가> 음반에 ‘너를 사랑해’라는 곡이 실린 이곡의 작사·작곡가이자 가수인 한동준씨는 기자가 말하기 전까지 자신의 노래가 실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자식과도 같은 내 노래가 나도 모르게 어떤 음반에 들어간다는 건 매우 불쾌한 일이죠.” ‘세월이 가면’의 작곡자 최명섭씨 역시 그의 곡이 <연가>에 들어가 있다는 걸 음반이 나온 지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최씨는 자신의 곡이 독집을 제외한 어느 음반에 들어가 있는지조차 전혀 파악이 되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확립된 서구나 일본에서라면 음반계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겠지만 우리에게는 비일비재한 일이다. 저작권 개념이 도입된 90년대 이후에도 판권과 저작권이 동일시될 정도로 저작권에 대한 인식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외국처럼 저작권에 의한 인세제도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지 않은 우리나라의 작사·작곡가들은 작사비나 작곡비를 일시불로 받는 것이 아직도 보편적이다. 게다가 계약 관행 역시 지극히 허술하기 때문에 판권을 넘김과 동시에 사실상 저작권 전부가 음반사에 넘어가는 형국이다. 최씨는 “‘세월이 가면’을 음반사에 넘기면서 계약서라는 걸 받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투 헤븐> <아시나요> 등 조성모의 노래 가사를 만든 강은경씨는 “직접승인을 하지 않고 주민등록증 복사해서 보내는 식으로 계약을 하는 게 아직까지도 음반계에서는 불문율”이라며 “편집권, 복제권이나 2차 저작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들어 있는 외국직배사의 계약서를 보고 놀랐다”고 고백했다.
더구나 지난해 한국음악저작권협회가 협회의 승인없이 편집음반을 내면서 저작권료를 지불하지 않은 음반 제작사에 대해 제기한 1심 소송에서 패소함에 따라 원작자들은 그전에 조금씩이나마 받던 저작권료마저 받지 못하게 됐다(쪽기사 참조). 이 판결은 결과적으로 비상식적인 편집음반의 탄생을 부추긴 꼴이 됐다. 음반사간의 거래나 교환을 통해 음원만 구하면 저작권료 걱정없이 음반을 찍어낼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제작자협회의 권승식 이사는 “저작권료가 제대로 지불된다면 음반가격의 1%만 작가들에게 지불해도 100만장이면 한명에게 2억원이 돌아가는데 60∼70곡을 수록한 음반이 나올 수 있겠느냐”며 “올바른 계약제도 정착과 인세제 도입만이 시장 왜곡을 막는 길”이라고 제안했다.
무모한 경쟁, 바닥 보인 뒤에야 사라질까
<연가>의 성공에 힘입어 속속 터지기 시작한 초저가 대규모 편집음반의 제작붐은 도소매상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지속될 것 같다. 벌써 댄스음악 108곡을 5장의 CD에 담은 <댄스 파라다이스>(크림)가 세 음반의 진열대 일부를 빼앗았고, 다른 대규모 음반사들 역시 방대한 양의 음원을 수집해 음반을 준비중에 있다. 그러나 제작자들은 이 열기가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한다. 신촌뮤직, 대영A/V와 음원을 공유해 <러브>를 제작한 동아기획 김영 대표는 “<연가>의 성공으로 음원에 대한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랐고, 제작사들 스스로도 음원을 주기 꺼려하기 때문에 다른 음반사의 음원을 사서 대규모 편집음반을 내기는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 <연가>의 경우 4월중 2집을 낼 계획이었으나 음원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다. 신나라 뮤직의 이순복 영업부장 역시 “한정된 인기곡을 대규모로 확보하려다 보면 레퍼토리가 중복될 수밖에 없고 덤핑 수준의 가격 역시 출혈경쟁이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서는 이런 음반의 유행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무모한 경쟁이 “바닥을 보인 뒤에야 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가뜩이나 좁은 시장이 무너진 다음에 제대로 된 형태로 복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음악평론가 송기철씨는 “<나우>나 <맥스> 같은 편집음반에 의해 10년에 걸쳐 완전히 초토화된 팝시장이 걸어온 과정을 압축해서 보는 것 같다”고 최근 가요음반 시장을 평가했다. 편집음반 제작자는 저가 편집음반이 불법음반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 낙관했지만 “합법음반이 불법음반을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한 대중음악평론가의 비판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최고의’, ‘결정판’ 따위의 수식어로 치장한 묵직한 편집음반을 찍어내는 제작자나, 좋다고 집어드는 소비자나 지금 깨알을 주우려다 참기름병을 넘어뜨리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김은형 기자 dmsgud@hani.co.kr


사진/ 요즘 음반매장에 가면 가수 포스터가 아닌 배우들의 포스터가 가득하다. 이들을 앨범재킷에 세운 대규모 편집음반이 음반시장을 휩쓸고 있기 때문이다.(강창광 기자)

사진/ 대규모 편집음반의 인기가 환영받고 있지만은 않다. 작사·작곡가, 가수 등이 음반이 나온 다음에야 자기 노래가 실렸다는 사실을 아는 경우도 흔하다.(강창광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