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학자 오주석, 3주기에 출간된 유고 수필집을 보며 그를 추억하다
▣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오늘 저녁 포근한 산들바람 불어오네…”로 시작하는 <편지의 이중창>은 천재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을 수놓는 보석이다. 10여 년 전부터는 명화 <쇼생크 탈출>의 삽입곡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피가로의 결혼>은 서양 바로크 문화의 절정을 구현했던 18세기 비엔나 음악 문화의 상징이다. 고결한 기품과 관능이 물처럼 흐르는 <편지의 이중창>은 그 <피가로의 결혼>에서도 가장 정점에 놓이는 곡이다. 자신의 순결을 범하려는 봉건귀족 알마비바 백작을 골탕먹이려고 의기투합해 가짜 편지를 쓰는 백작 부인과 하녀 수산나의 호쾌한 대화가 모티브가 되어 이 아리따운 노래를 이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DVD를 통해 14년 전 만든 <쇼생크 탈출>의 한순간을 보고 있다. 교도소장의 재산 관리를 맡는 주인공 앤디(팀 로빈스)가 죄수들을 위해 기증받은 책 속에서 발견한 <피가로의 결혼>의 이중창 LP음반. 앤디는 간수 사무실 방문을 잠가놓고 확성기 앰프로 이 음악을 죄수 모두에게 들려준다. 회색빛 확성기 아래서 넋을 잃고 음악을 듣는 작업장 죄수들의 모습은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 예술은 자유의 영원한 연인이다. 예술이 동경하는 자유의 기쁨이 옥중의 고통마저도 잊게 했다. 탈옥한 앤디의 동료 레드(모건 프리먼)는 영화 속에서 회상한다. “노래 부른 여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노래하고 있었다… 그 노래는 이 회색 공간에서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영화 속 이중창을 들으면서, 레드의 멋진 대사를 자신의 수필에 ‘모든 사람이 하나게 되게 만드는 자유’라며 인용했던 한 사람의 미술사학자를 생각한다. 오주석(1956~2005). 국립박물관, 호암미술관 학예사를 지낸 그는 대중 강연으로 우리 옛 그림의 진정한 즐거움과 가치를 알리는 데 애쓰다 3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술사학의 학문적 장벽을 박차고 나와 레드의 말처럼 옛 그림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을 글과 말로 퍼뜨렸던 사람이다. 지난 5월13일 서울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유고 수필집 <그림 속에 노닐다>(솔 펴냄)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참석자는 30명도 채 안 됐지만, 유고집 수필과 잡지에 난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고인을 추억하기에는 좋았다. 미술사를 곁눈질하고 다닌 기자에게 그의 모습은 청년기의 화가 고흐처럼 털털한 그림 전도사의 인상으로 남아 있다. 역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서 보이지만, 그는 조선 전통회화에 얹혀진 고루한 먼지를 털고 교양과 흥미가 있는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내 대중에게 처음 본격적으로 알렸다. 18세기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산 풍경의 걸작 <인왕제색도>가 1751년 5월 하순 장마가 갠 뒤 위독한 친구 이병연의 쾌유를 빌며 그린 그림이었다거나, 저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초상에 원래는 상반신도 같이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 등 지금도 회자되는 회화사의 논쟁거리와 비화들을 그는 숱하게 발굴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의 먼지 속에 쌓였던 숱한 옛 그림들이 그의 연구로 다시 의미를 얻었다.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 인생과 단원의 아름답고 투명한 예술혼의 전모는 오주석의 노력으로 처음 온전히 조명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서 가장 큰 전통회화 중 하나인 화원 이인문의 걸작 <강산무진도>의 창작 배경을 논문으로 처음 밝힌 것도 그만의 업적이다. 1995년 그가 기획한 단원 김홍도 탄생 250주년 기념전은 국내 회화사에 큰 획을 그은 전시이자, 그때 쓴 원고지 1천 매가 넘는 논문은 명저 <단원 김홍도>로 남았다. 오십을 채 못 넘긴 그의 인생을 규정지은 것은 시서화, 예능, 한학에 두루 통달했던 아름다운 화가 단원 김홍도와 동서양 음악, 그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생전 김홍도의 분신 같은 삶을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벗들은 증언한다. 클래식 기타의 달인이었던 고인은 단원이 즐겨 켰던 거문고를 연습하고 연주했고, 숱한 고서와 시문들을 섭렵하고, 서예가 김응현 아래에서 글씨를 배웠다. 겸재 정선과 이인문의 인문적 그림을 알기 위해 <주역>의 공부도 놓지 않았다. 박봉과 생활고를 딛고서 그가 이룬 학문적 성취의 이면에는 클래식과 정악산조에 탐닉했던 음악 취향도 한몫했다. 2000년 <한겨레> 문화면에 장기 연재했던 ‘인문학 데이트’의 대담을 마친 뒤 서울 마포의 면옥 을밀대에서 뒤풀이 겸 해서 만난 적이 있다. 냉면 면발을 정신없이 빨아들이던 필자에게 소주잔 권하며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에 대해 진중하게 이야기하던 학자 오주석. 그의 불콰한 얼굴은 어제처럼 뇌리에 남아 있다.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절친한 동료였던 회화사 연구자 강관식 교수(한성대)는 “오늘은 3년상이 끝나는 탈상일”이라며 “이제 그의 추모일을 길한 날로 바꿀 때가 됐다”고 덕담을 했다. 흥겹지만, 약간은 휑한 느낌도 남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절명한 한 시인의 시구가 생각났다. 종로의 극장에서 이미지를 호흡하려다 숨져간 기형도(1960~89)의 절창이었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비가2-붉은 달’ 부분)

영화 속 이중창을 들으면서, 레드의 멋진 대사를 자신의 수필에 ‘모든 사람이 하나게 되게 만드는 자유’라며 인용했던 한 사람의 미술사학자를 생각한다. 오주석(1956~2005). 국립박물관, 호암미술관 학예사를 지낸 그는 대중 강연으로 우리 옛 그림의 진정한 즐거움과 가치를 알리는 데 애쓰다 3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술사학의 학문적 장벽을 박차고 나와 레드의 말처럼 옛 그림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즐거움과 감동을 글과 말로 퍼뜨렸던 사람이다. 지난 5월13일 서울 연세대 동문회관에서 유고 수필집 <그림 속에 노닐다>(솔 펴냄)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참석자는 30명도 채 안 됐지만, 유고집 수필과 잡지에 난 사진을 만지작거리며 고인을 추억하기에는 좋았다. 미술사를 곁눈질하고 다닌 기자에게 그의 모습은 청년기의 화가 고흐처럼 털털한 그림 전도사의 인상으로 남아 있다. 역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서 보이지만, 그는 조선 전통회화에 얹혀진 고루한 먼지를 털고 교양과 흥미가 있는 이야깃거리를 끄집어내 대중에게 처음 본격적으로 알렸다. 18세기 겸재 정선이 그린 인왕산 풍경의 걸작 <인왕제색도>가 1751년 5월 하순 장마가 갠 뒤 위독한 친구 이병연의 쾌유를 빌며 그린 그림이었다거나, 저 유명한 공재 윤두서의 초상에 원래는 상반신도 같이 그려져 있었다는 사실 등 지금도 회자되는 회화사의 논쟁거리와 비화들을 그는 숱하게 발굴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의 먼지 속에 쌓였던 숱한 옛 그림들이 그의 연구로 다시 의미를 얻었다. 천재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 인생과 단원의 아름답고 투명한 예술혼의 전모는 오주석의 노력으로 처음 온전히 조명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에서 가장 큰 전통회화 중 하나인 화원 이인문의 걸작 <강산무진도>의 창작 배경을 논문으로 처음 밝힌 것도 그만의 업적이다. 1995년 그가 기획한 단원 김홍도 탄생 250주년 기념전은 국내 회화사에 큰 획을 그은 전시이자, 그때 쓴 원고지 1천 매가 넘는 논문은 명저 <단원 김홍도>로 남았다. 오십을 채 못 넘긴 그의 인생을 규정지은 것은 시서화, 예능, 한학에 두루 통달했던 아름다운 화가 단원 김홍도와 동서양 음악, 그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생전 김홍도의 분신 같은 삶을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고 벗들은 증언한다. 클래식 기타의 달인이었던 고인은 단원이 즐겨 켰던 거문고를 연습하고 연주했고, 숱한 고서와 시문들을 섭렵하고, 서예가 김응현 아래에서 글씨를 배웠다. 겸재 정선과 이인문의 인문적 그림을 알기 위해 <주역>의 공부도 놓지 않았다. 박봉과 생활고를 딛고서 그가 이룬 학문적 성취의 이면에는 클래식과 정악산조에 탐닉했던 음악 취향도 한몫했다. 2000년 <한겨레> 문화면에 장기 연재했던 ‘인문학 데이트’의 대담을 마친 뒤 서울 마포의 면옥 을밀대에서 뒤풀이 겸 해서 만난 적이 있다. 냉면 면발을 정신없이 빨아들이던 필자에게 소주잔 권하며 프란츠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에 대해 진중하게 이야기하던 학자 오주석. 그의 불콰한 얼굴은 어제처럼 뇌리에 남아 있다. 출판기념회 자리에서 절친한 동료였던 회화사 연구자 강관식 교수(한성대)는 “오늘은 3년상이 끝나는 탈상일”이라며 “이제 그의 추모일을 길한 날로 바꿀 때가 됐다”고 덕담을 했다. 흥겹지만, 약간은 휑한 느낌도 남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털어내지 못하고 절명한 한 시인의 시구가 생각났다. 종로의 극장에서 이미지를 호흡하려다 숨져간 기형도(1960~89)의 절창이었다.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비가2-붉은 달’ 부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