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숙박하지 않는다고 호텔 뒤쪽의 해변길 산책을 포기할쏘냐. 제주도 중문관광단지에 위치한 신라호텔, 롯데호텔 등은 바다를 향한 건물 뒤편 산책길도 잘 만들어놓았다. 당당히 신라호텔 정문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나오면 바로 산책로다. 나무 계단으로 해변까지 내려가는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밤이면 분위기 있는 조명도 켜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해수욕장 부근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오면 걸음 속도에 따라 1시간~1시간30분 정도 걸린다. 모래밭 위에 옆 사람의 이름을 쓰고 나서 “여기 쓴 이름은 파도에 곧 지워지겠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영원할 거야”와 같은 ‘멘트’를 날린다면 2시간 이상 잡아야 한다. 제주도에 놀러갔다 싸우게 된 연인이라면 들르시라. 참고로 평일 밤엔 한적하다. 흠흠.
임지선 기자
‘일 삼아’ 길
강원 문암동 길은 취재차 간 길이다. 내린천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거슬러 오르는 숨겨진 숲길이다. 사륜자동차가 통행하는 비포장도로지만, 그보다는 걷기 편한 숲길이다. 내린천을 따르는 446번 지방도로로 가다가 홍천 살둔마을을 굽어보는 지점에 문암동 길로 빠지는 소로가 있다. ‘반달밭 민텔’ 표지판을 따라가도 된다. 길은 한가롭고 평화롭다. 가로수처럼 핀 야생화가 발길을 잡고,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쉬었다 가라 속삭인다. 시멘트 다리 건너 첫 번째 갈림길에서 왼쪽을 택하고(운리동으로 가는 오른쪽 길 또한 숨겨진 숲길이다), 두 번째 갈림길에서는 문암동 표지판을 따른다. 문암동은 산골 아래 너른 밭을 지닌 산골 마을이다. 여기까지 8km. 2시간30분 정도 걸린다. “여행 다니면서 먹고사니 좋겠다”는 말에 “모르는 소리”가 바로 튀어나오지만, 이런 길을 갔을 때면 “그래, 내 일 좋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남종영 기자 한겨레 매거진팀
‘안심’ 길
먼 길이 그리울 때 다정한 길을 찾는다. 152번 또는 410번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 수유동 종점에서 내려 화계사(華溪寺)까지 걸어가면 채 15분이 걸리지 않는다. 북한산 화계사 앞마당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여럿이다. 이 오래된 절의 당우보다 울울한 나무 그늘이 더 법당 같다. 화계사 뒤로 오르는 순한 길은 말 그대로 빛깔 가득한 아늑한 계곡이다. 누군가 ‘새들이 짝짓는 철에는 조용히 걷자’는 알림판을 걸어둔다. 잠시라도 ‘안심’을 누리고 싶을 때 이 순환의 처소를 찾아보기를. 삼성암 앞에서 내처 올라가면 칼바위길이고, 옆으로 빠지면 범골이고, 아래로는 빨래골 매표소다.
김수한 출판사 ‘산책길’ 주간
‘주민’의 길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 4개월이 지난 2000년 여름, 나는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가 끝난 뒤 아파트가 밀집한 서울 무악재역에서 하숙방이 있는 신촌까지 걸었다. 길가에는 세탁소, 슈퍼, 비디오대여점 등의 상점들이 있었고 상점을 따라 내려오면 인왕시장이, 시장을 넘으면 스위스그랜드호텔이, 호텔을 넘으면 다시 슬레이트 지붕을 이고 있는 ‘서민스러운’ 집들이 모여 있는 고개가 나왔다. 천천히 걸으면 1시간40분쯤 걸렸던 것 같다. 파마 기구를 만 채 집으로 뛰어가는 아줌마, 퇴근길에 과일을 사는 아저씨, 단어수첩을 들고 집에 가는 여고생, 삶은 고구마·직접 캔 나물을 내놓고 파는 할머니까지. 연방 두리번대며 ‘서울 주민’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걸었던 그 시간은 나를 신촌·명동만 아는 ‘서울 유학생’에서 동네를 아는 ‘서울 주민’으로 바꿨다.
박수진 기자
‘점심 산책’ 길
영화 <와니와 준하>를 서울 명륜동에서 찍었다. 점심밥을 먹고는 일행과 혜화동 로터리를 끼고 돈 뒤 성북동 가는 길을 30~40분씩 걷곤 했다. 같이 밥을 먹지 않더라도 걸어가면 여기서 불쑥, 저기서 불쑥 점심 뒤 산책을 즐기는 같은 팀들을 만나곤 했다. 한번은 머리를 맞대고 모여서 길 가운데 여기가 최고니, 저기가 최고니 하는 ‘길 논쟁’이 붙기도 했다. 나는 주택가 옆쪽으로 난 오르막길을 사랑했다. 벽 쪽으로 나무 그림자가 떨어지는 무늬가 좋은데 올라가 아래쪽을 보는 것보다 올려다보는 게 좋다. 그렇게 우습게 시작한 산책은 볕 좋은 올봄, 걸어서 출근하기로 이어졌다. 사직공원을 거쳐 경복궁의 트인 입구를 통과해 창덕궁, 창경궁을 지나 대학로까지 가는 1시간 길을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걷는다.
심현우 영화사 ‘청년’ 실장
‘시작하는 연인’의 길
날이 심하게 춥거나 덥지 않으면 남자친구와 손을 잡고 여기저기 걸어다니며 구경하는 걸 즐긴다. 인파를 헤치며 익숙한 손의 감촉에 위안받는 느낌도 좋고, 고즈넉한 길에서 남이 들으면 민망할 꽃노래를 흥얼거리는 것도 재밌다. 종로 쪽에서 데이트할 땐 종종 헌법재판소 옆길에서 성균관대 후문까지 이어진 산길을 산책한다. 청신한 산기운을 즐기며 여유롭게 걸으면 삼사십 분쯤 걸린다. 나름 산인지라 중턱쯤 오르면 서울 시내 정경도 내려다보인다. 코스의 마무리로는 성균관대 후문으로 진입해, 풋풋한 젊음의 기운을 쐬어준다. 간혹 마을버스가 지날 뿐 인적 없고 으슥해, 시작하는 연인에게 추천할 만한 코오-스.
김송은 <팝툰> 기자
‘시장’ 길
서울 종로5가 광장시장. 시장을 가로지르는 긴 중앙통로 먹을거리 좌판에 쪼그려앉아 국수 한 그릇에 담겨져 나오는 ‘살아야 하는 이유’를 먹어보라. 어스름 저녁 신세계백화점의 화려한 네온 빛 아래 그늘진 골목길로 접어들어 만나는 남대문시장을 걸어보라. 새벽이라면 동대문시장으로 가자. 제 몸보다 더 큰 가방을 질질 끌며 밤을 밝히는 어린 사장님에게서 열정을 배울 수 있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이리저리 쫓기다 결국 신설동으로 밀려나간 황학동 벼룩시장을 찾아가자. 동대문시장부터 황학동을 거쳐 신설동까지 꼭 걸어서 가자. ‘삶은 비루하다’는 말이 ‘삶은 계란’만큼 엉터리란 걸 깨닫을 수 있다.
윤첨지 자유기고가
돌아오는 길
딸들과 함께 야영을 하며 우리나라 남쪽 끝까지 여행한 적이 있다. 그날의 베이스캠프가 정해지면 주변을 걸어다녔는데, 아이는 새재 올라가는 옛길이 제일 좋았다고 한다. 이유는 “올라갈 때는 조금 힘들었는데 가보니 탁 트인 경치가 너무 멋있어서”라고. 덧붙여 “엄마, 원래 그런 길이 좋은 거 아닌가?” 하고 되묻기까지 한다. 새재 옛길은 괴산의 조령산휴양림(043-833-7994)에서 조령3관문까지 20여 분 남짓 숲을 따라 오른다. 백두대간 산마루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이고 길은 문경새재공원으로 이어진다. 걷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짧게 걷고도 만족도가 높은 코스로 좋다. 월악산국립공원의 하늘재 옛길도 비슷한 이유로 권한다. 사실, 아이들이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길은 따로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김선미 <아이들은 길 위에서 자란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