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앞에서 쥐어짜는 눈물 대신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를 보라
▣ 김비 소설가
분명 모두들 마음에 드는 비유는 아니겠지만, 가끔씩 나는 나 자신을 끝까지 벗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일 때가 있다. 물론 그것은 붉은 등불 아래, 하나씩 옷가지를 끌어내리는 요염한 몸짓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내 취향은 팔뚝 하나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고리타분한 것에 가깝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르지만, ‘트랜스젠더’라는 이해할 수 없는 족속으로 이름 붙여지는 바람에, 내 궁금증은 더욱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어떤 세포들의 변이일까. 모두들 ‘다르다’라고 이야기하는 내 삶의 방향은 어떤 시간의 엇갈림이며, 어떤 생각의 틀어짐이며, 어떤 웅덩이에 발을 빠트린 것이었을까. 정말 그건 틀어짐일까, 엇갈림일까. 그리고 어딘가에 나를 빠트린 것일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근원적인 것을 알고 싶어하는 내 자연스런 욕망은 그저 욕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에 관해 가르쳐주는 텍스트는 없었으며, 처음부터 내 궁금증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껏 세상이 들여다본 우리들은, 얼굴 성형의 결과이거나, 브래지어의 사이즈이거나, 그도 아니면 카메라 앞에서 쥐어 짜내는 눈물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사람생각 펴냄). 섹시 화보집도 아니고, 감동 스토리도 아닌 붉은 책 한 권은 빼곡히 우리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 어디에서도 다루어진 적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트랜스젠더인 우리 자신들조차도 떠올려본 적 없는 미묘하고 세심한 일곱 저자들의 사유는 소름 돋을 만큼 깊고 또 다양하다. 그들 사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불필요한 것으로 매도되어 도외시되고 있는 우리들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시도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루인씨는 트랜스젠더의 삶을 옥죄고 있는 사회 제도와 주민등록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의학화 과정에 따른 성전환 욕망의 변화, 그리고 의학기술 발달과 성전환 수술의 관계를 치열하게 파헤치는 한영희씨의 글은 사유의 수준을 넘어서, 거의 해부에 가깝다. 여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의 남성성과,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한 성전환자들의 남성성을 비교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하는 나영정씨는 가장 혼란스럽고 미묘한 경계를 거침없이 파고든다. 1960년대와 70년대 기사들 속에서 벼랑 끝으로 몰린 성전환자들의 자취를 찾아내, 극단적으로 왜곡된 시대 속에서 그들의 아픈 삶을 우리들에게 환기시키는 김일란씨의 글은 우리들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있어서 따스하다. 성전환자와 법제도 사이의 관계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한상희씨의 글은 우리들에 대한 사유의 필요성과 의미, 그리고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감싸지 못하는 우리나라 법제도의 나태함을 질타한다. 이현씨는 성전환자의 성별 변경에 대한 국내외의 법적 기준과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국내외의 다양한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며 젠더의 담론, 성전환자에 대한 담론의 자장을 확대시킨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김준우씨의 글이다. 그는 사유의 일차원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들의 머릿속에,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들여다봄으로써 사유의 범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우리가 지나친 환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냉정한 숨고르기를 유도한다. 본문에서 그가 언급한 “섹스/젠더를 사유한다는 것의 출발점은 여성/남성 둘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105~106쪽)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젠더에 대한 사유가 일방적인, 빤한 무언가의 도출이 아니라, 끈질기게 같이 들여다보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공동의 작업이며, 끝까지 열린 마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점잖게 충고하고 있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근원적인 것을 알고 싶어하는 내 자연스런 욕망은 그저 욕망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내가 알고 싶어하는 것들에 관해 가르쳐주는 텍스트는 없었으며, 처음부터 내 궁금증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다. 기껏 세상이 들여다본 우리들은, 얼굴 성형의 결과이거나, 브래지어의 사이즈이거나, 그도 아니면 카메라 앞에서 쥐어 짜내는 눈물뿐이었다. 그런데 여기 책 한 권이 나타났다. <젠더의 채널을 돌려라>(사람생각 펴냄). 섹시 화보집도 아니고, 감동 스토리도 아닌 붉은 책 한 권은 빼곡히 우리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그건 그 어디에서도 다루어진 적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 트랜스젠더인 우리 자신들조차도 떠올려본 적 없는 미묘하고 세심한 일곱 저자들의 사유는 소름 돋을 만큼 깊고 또 다양하다. 그들 사유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불필요한 것으로 매도되어 도외시되고 있는 우리들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시도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루인씨는 트랜스젠더의 삶을 옥죄고 있는 사회 제도와 주민등록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의학화 과정에 따른 성전환 욕망의 변화, 그리고 의학기술 발달과 성전환 수술의 관계를 치열하게 파헤치는 한영희씨의 글은 사유의 수준을 넘어서, 거의 해부에 가깝다. 여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의 남성성과,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환한 성전환자들의 남성성을 비교하며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하는 나영정씨는 가장 혼란스럽고 미묘한 경계를 거침없이 파고든다. 1960년대와 70년대 기사들 속에서 벼랑 끝으로 몰린 성전환자들의 자취를 찾아내, 극단적으로 왜곡된 시대 속에서 그들의 아픈 삶을 우리들에게 환기시키는 김일란씨의 글은 우리들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있어서 따스하다. 성전환자와 법제도 사이의 관계를 냉정하게 들여다보는 한상희씨의 글은 우리들에 대한 사유의 필요성과 의미, 그리고 사회 구성원 모두를 감싸지 못하는 우리나라 법제도의 나태함을 질타한다. 이현씨는 성전환자의 성별 변경에 대한 국내외의 법적 기준과 사례들을 살펴봄으로써 국내외의 다양한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며 젠더의 담론, 성전환자에 대한 담론의 자장을 확대시킨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김준우씨의 글이다. 그는 사유의 일차원적인 행위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젠더에 대한 사유를 통해 우리들의 머릿속에, 트랜스젠더 당사자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들여다봄으로써 사유의 범위를 최대치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우리가 지나친 환상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냉정한 숨고르기를 유도한다. 본문에서 그가 언급한 “섹스/젠더를 사유한다는 것의 출발점은 여성/남성 둘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이다”(105~106쪽)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젠더에 대한 사유가 일방적인, 빤한 무언가의 도출이 아니라, 끈질기게 같이 들여다보고 함께 고민해야 하는 공동의 작업이며, 끝까지 열린 마음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점잖게 충고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