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전통 가요 ‘파두’를 들으며 읽는 황인숙의 여섯 번째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
▣ 신형철 문학평론가
비 오면 생각난다. 황인숙의 시 한 편. “비가 온다./ 네게 말할 게 생겨서 기뻐./ 비가 온다구!// 나는 비가 되었어요./ 나는 빗방울이 되었어요./ 난 날개 달린 빗방울이 되었어요.// 나는 신나게 날아가./ 유리창을 열어둬./ 네 이마에 부딪힐 거야./ 네 눈썹에 부딪힐 거야./ 너를 흠뻑 적실 거야./ 유리창을 열어둬./ 비가 온다구!// 비가 온다구!/ 나의 소중한 이여./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 전문) 황인숙 이전에 이런 발성은 없었다. 말 그대로 ‘발랄’(潑剌), 물방울처럼 흩어지는 언어들이다. 숱한 시 중에서 두 편만 옮긴다.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기 싫어서/ 넘어졌었죠./ 넘어진 게 어이없어서/ 쫘악 뻗었죠./ 당신의 시선의 쇳물/ 쏟아졌어요./ 나는 로봇처럼/ 발딱 일어났어요./ 강철 얼굴을 천천히/ 당신께 돌렸어요./ 내 구두를 미끄러뜨린 게/ 무어겠어요?”(‘데이트’ 전문) 삶에서 자주 넘어지는 사람들이 데이트에서라고 별수 있나. 기우뚱하다가 뻗었다. 남자의 뜨악한 시선이 ‘쇳물’처럼 쏟아진다. 마음을 다잡고 ‘강철 얼굴’을 든다. 그리고 이런 능청. ‘내 마음이 누구 때문에 넘어졌는데!’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강’ 전문) ‘심장의 벌레’에서부터 ‘터지는 복장’에 이르는 유려한 리듬에 정신 놓고 있다가 마지막에서 한 대 맞는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면 어리광 부리지 말라는 거다. 청승과 신파는 혼자 처리하라는 거다. 이런 시들, 신기하다. 부러 어여쁜 척하지 않는데 분명히 어여쁘고, 정색하고 훈계하는 듯 보여도 위압적이지가 않다. 발랄한 언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삶이 놓여 있는 자리가 워낙에 그런 것이다.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나의 맹세’에서) 처지는 몸종인데 체질은 아씨란다. 그래, 처지와 체질의 보드라운 긴장 때문에 그녀의 시들이 그리 생생했던 것이다. 지난 연말에 출간된 여섯 번째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에서도 그녀는 여전하다. 그런데 이런 시가 있다. “지난 밤,/ 리스본의 첫 밤이자 마지막 밤/ 파두 카페에 갔었다/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라는 말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 거듭거듭 노래했다/ 눈 밑살에 주름이 쩌억, 가는 듯했다/ 파두 기타가 검은 옷을 입은 숙명을 이끌었다/ 숙명은 떨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내 영혼은 숙명에 홀렸다”(‘파두-Dear Johnny’에서) 시인은 2004년 11월경에 포르투갈 리스본에 다녀온 것 같다(그녀와 절친한 고종석의 연재 에세이 ‘도시의 기억’ 중 ‘리스본’ 편을 보고 알았다). 거기서 포르투갈의 전통 가요를 파두(fado, ‘숙명’이라는 뜻)를 들었나 보다. 이 시가 왠지 밟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라고 내내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른 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오를 길이라면, 내려가지 말자.”(‘파두-비바 알파마!’에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파두 <어두운 숙명>을 들으며 저 두 문장을 계속 엮어보았다. 숙명에는 기쁨이 없지만, 다시 오를 길이라면 내려가지 말자. 안 그래도 눅눅한 삶이었는데, 이 문장은 어쩐지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황인숙 특유의 ‘발랄’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이 홀가분한 긍정이 참 좋다. 그러고 보니 그녀 나이 이제 오십이다. ‘고양이 시인’이라는 별명은 이제 거두는 게 좋겠다. 굳이 고양이라 한다면 ‘파두를 듣는 고양이’라 하든지. 이제 그녀는 이모 같다. 이모, 사는 게 왜 이리 억지 같지?, 그러면 꼭 안아줄 것 같은 이모. 엄마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이모, 투정 부리기 어려운 큰이모도 아니고 좀 아슬아슬해 보이는 막내이모도 아닌, 그냥 둘째이모. 이모의 시에서 느끼는 이 편안한 위안이 좋다. 이런 게 어떤 건지, 삼촌들은 모른다.

(사진/ 이영진)
“당신 앞에서/ 비틀거리기 싫어서/ 넘어졌었죠./ 넘어진 게 어이없어서/ 쫘악 뻗었죠./ 당신의 시선의 쇳물/ 쏟아졌어요./ 나는 로봇처럼/ 발딱 일어났어요./ 강철 얼굴을 천천히/ 당신께 돌렸어요./ 내 구두를 미끄러뜨린 게/ 무어겠어요?”(‘데이트’ 전문) 삶에서 자주 넘어지는 사람들이 데이트에서라고 별수 있나. 기우뚱하다가 뻗었다. 남자의 뜨악한 시선이 ‘쇳물’처럼 쏟아진다. 마음을 다잡고 ‘강철 얼굴’을 든다. 그리고 이런 능청. ‘내 마음이 누구 때문에 넘어졌는데!’ “당신이 얼마나 외로운지, 얼마나 괴로운지,/ 미쳐버리고 싶은지 미쳐지지 않는지/ 나한테 토로하지 말라/ 심장의 벌레에 대해 옷장의 나방에 대해/ 찬장의 거미줄에 대해 터지는 복장에 대해/ (…)/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강’ 전문) ‘심장의 벌레’에서부터 ‘터지는 복장’에 이르는 유려한 리듬에 정신 놓고 있다가 마지막에서 한 대 맞는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으면 어리광 부리지 말라는 거다. 청승과 신파는 혼자 처리하라는 거다. 이런 시들, 신기하다. 부러 어여쁜 척하지 않는데 분명히 어여쁘고, 정색하고 훈계하는 듯 보여도 위압적이지가 않다. 발랄한 언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녀의 삶이 놓여 있는 자리가 워낙에 그런 것이다. “아, 비천하게도 나는 아씨 체질인 것이다./ 처지는 비록/ 아씨를 모셔도 시원치 않을지라도.”(‘나의 맹세’에서) 처지는 몸종인데 체질은 아씨란다. 그래, 처지와 체질의 보드라운 긴장 때문에 그녀의 시들이 그리 생생했던 것이다. 지난 연말에 출간된 여섯 번째 시집 <리스본행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에서도 그녀는 여전하다. 그런데 이런 시가 있다. “지난 밤,/ 리스본의 첫 밤이자 마지막 밤/ 파두 카페에 갔었다/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라는 말에는 기쁨이 없다고/ 숙명이 거듭거듭 노래했다/ 눈 밑살에 주름이 쩌억, 가는 듯했다/ 파두 기타가 검은 옷을 입은 숙명을 이끌었다/ 숙명은 떨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내 영혼은 숙명에 홀렸다”(‘파두-Dear Johnny’에서) 시인은 2004년 11월경에 포르투갈 리스본에 다녀온 것 같다(그녀와 절친한 고종석의 연재 에세이 ‘도시의 기억’ 중 ‘리스본’ 편을 보고 알았다). 거기서 포르투갈의 전통 가요를 파두(fado, ‘숙명’이라는 뜻)를 들었나 보다. 이 시가 왠지 밟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숙명에는 기쁨이 없다”라고 내내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른 시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다시 오를 길이라면, 내려가지 말자.”(‘파두-비바 알파마!’에서)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파두 <어두운 숙명>을 들으며 저 두 문장을 계속 엮어보았다. 숙명에는 기쁨이 없지만, 다시 오를 길이라면 내려가지 말자. 안 그래도 눅눅한 삶이었는데, 이 문장은 어쩐지 위로가 되는 것이었다. 황인숙 특유의 ‘발랄’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이 홀가분한 긍정이 참 좋다. 그러고 보니 그녀 나이 이제 오십이다. ‘고양이 시인’이라는 별명은 이제 거두는 게 좋겠다. 굳이 고양이라 한다면 ‘파두를 듣는 고양이’라 하든지. 이제 그녀는 이모 같다. 이모, 사는 게 왜 이리 억지 같지?, 그러면 꼭 안아줄 것 같은 이모. 엄마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이모, 투정 부리기 어려운 큰이모도 아니고 좀 아슬아슬해 보이는 막내이모도 아닌, 그냥 둘째이모. 이모의 시에서 느끼는 이 편안한 위안이 좋다. 이런 게 어떤 건지, 삼촌들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