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루엣 애니메이션 <프린스 앤 프린세스>와 포대 인형극 <성석전설>이 주는 상상력과 영감
오는 5월5일 개봉할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애니메이션을 사랑하는 성인들에게 가뭄 속 단비다. 이 작품은 <키리쿠와 마녀>(1998)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미셸 오슬로 감독의 99년작으로, 이전에 만들었던 단편 애니메이션 몇편을 모으고 일부분을 새로 각색해 만든 것이다.
빛과 어두움이 자아내는 고급스런 매력
시끄러운 도심의 한 극장, 소년과 소녀가 늙은 기술자와 함께 매일 밤 영화를 만든다. 소녀는 공주가 되고 소년은 왕자가 되는 식이다. ‘공주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무화과 소년’ ‘마녀의 성’ ‘왕자와 공주’ 등 전체 여섯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동화나 민담을 소재로 중세와 미래, 동양과 서양을 넘나들며 여섯개의 각기 다른 ‘사랑’을 보여준다. 공주님, 왕자님 이야기라고 진부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동화는 배경일 뿐이고, 전래동화가 가지고 있는 남녀차별적 내용을 배제한 새로운 줄거리다. 그중에서도 ‘마녀의 성’은 걸작이다. ‘마녀의 성을 정복하는 자는 공주를 주겠다’고 왕이 선포하자 몰상식한 왕자들이 서로 몰려와 힘으로 성을 부수려고 한다. 불화살을 날리고, 포탄을 퍼부어도 성은 끄덕없다. 그러자 지혜로운 소년이 성문을 두드리고 “들어가도 됩니까?”하고 물은 뒤 성 안에 들어간다. 마녀를 만난 소년은 그 지성미에 반해 공주를 마다하고 마녀와 결혼한다는 내용이다. <키리쿠와 마녀>를 만들 때 “‘지혜’의 의미를 찾아보고 싶었다”라고 말한 오슬로 감독의 주제의식이 여기서도 이어진다.
그러나 <프린스 앤 프린세스>가 각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창작하는 사람에게 전통문화는 영감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기법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와 함께 <성석전설>(3월24일 개봉, 감독 황치앙화) 역시 전통 인형극 기법을 이용해 만든 작품로, 전통예술의 무한한 변용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이른바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명한 배경 위에 종이나 천 또는 나무판으로 만든 평면 인형을 올려놓고 빛을 통과시킨다. 이를 한 프레임씩 찍어서 돌리면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실루엣 애니메이션이 탄생한다. 아드만 감독의 <월레스와 그로밋>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따뜻한 손맛’이라면, 실루엣 애니메이션은 빛과 어두움이 자아내는 고급스런 매력이 특징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모태격인 그림자 인형극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된다. 이중에서도 특히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발견되는 와양(wayang)이 대표적이다. 이미 10세기 이전에 발달한 와양은 힌두교 서사시 ‘마하바라타’ 등을 소재로 삼는 등 종교적 의미까지 지니고 있는 신비스러운 인형극이다. 중국의 그림자극은 당나라 때 시작되어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왔다. 와양과 중국의 인형극은 18세기 중엽 유럽인 여행객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것이 옹브르 시누아즈(ombres chinoises) 즉 중국의 그림자극이라고 불렸는데, 그림자가 주는 무한한 상상력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왕실에서까지 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그림자 전문 극단과 그림자극 전용 극장이 생길 정도였다. 프랑스인인 미셸 오슬로감독은 이러한 그림자 인형극, 즉 옹브르 시누아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된다. 정교한 인형, 땀까지 흘린다
한편 <성석전설>은 중국의 전통 인형극 포대희(布袋戱)를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포대희는 말 그대로 포대를 쓰고 인형 안에 손을 넣어 조종하는 인형극이다. <성석전설>을 만들 때는 인형 조종자들이 세트 바닥에 들어가 인형을 움직였다고 한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인형들이기 때문에 얼핏 퍼펫 애니메이션(puppet animation)으로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인형을 한 프레임씩 찍어 연결시키는 퍼펫 애니메이션과 달리 움직이는 인형 그 자체를 찍었기 때문에 실사영화로 봐야 한다. 줄거리는 평이하고 CG(컴퓨터그래픽) 역시 조잡한 <성석전설>을 떠받치는 힘은 포대희 인형의 정교함이다. 전통 인형극 가문의 계승자로 태어난 황치앙화(黃强華) 감독은 러닝타임 95분 동안 쏟아지는 관객의 시선을 견디기 위해서 인형의 눈에 수정을, 인형 머리칼에 인모(人毛)를 썼고, 사람 옷 못지않게 복잡한 인형 의상을 입히는 등 디테일에 신경썼다.
특히 보물 천문석이 숨겨진 화염곡 장면을 보면 황 감독이 인형다루는 솜씨를 가늠할 수 있다. 이곳에서 등장인물 소환진은 사람의 출입을 막기 위해 설치해둔 회전칼날의 함정에 빠져 회전칼날에 칼을 박고 간신히 버티게 된다. 무림고수 홍진이 와서 도와주기를 기다리며 부르르 떠는 소환진의 땀 맺힌 얼굴을 보면 이것이 인형인가 싶을 정도다.
이처럼 정교한 인형을 담보로 다양한 앵글을 보여준 <성석전설>과는 달리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평면적인 앵글밖에는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평면 앵글 중에서도 좌우배치가 대부분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등장인물들은 땅을 딛고 서야 하기 때문에 인형이 나무에 올라가거나 우주선을 타지 않는 한 인물이 위아래로 배치되는 경우도 별로 없다. 그러나 실제로 이 작품을 보면 이런 단점은 독특함으로 비쳐질 정도다. 일단 와이드 숏과 클로즈업을 섞어서 지루함을 없앴고, 등장인물이 까맣다는 것을 반대로 이용해서 화려한 배경색을 살렸다. 이집트 여왕 옷의 섬세한 문양이 유난히 곱게 살아난 것도 윤곽선이 뚜렷한 실루엣 애니메이션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공주와 다이아몬드 목걸이’편에서 다이아몬드 111개의 아름다움은 셀 애니메이션으로는 얻어내기 어려운 실루엣 애니메이션만의 표현력을 100% 살린 결과다. 마법의 다이아몬드를 표현하기 위해서 감독은 유리에 마가린을 바르고 빛을 투과시키는 방법을 쓰는 등 돈 안 들인 아이디어의 승리를 보여줬다는 후일담이다.
돈 안 들인 아이디어의 승리
미셸 오슬로 감독은 지난해 한 인터뷰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모방해서는 곤란하다. 자기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흥행에 성공하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모방하지 않되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노파의 가운’편과 ‘무화과 소년’편이 이 궁금증에 약간의 힌트를 줄 수도 있겠다. 소재는 일본 민담에 이집트 이야기요, 배경은 일본 화가 호쿠사이의 그림과 피라미드의 내벽 그림에서 따온 것이되 이 작품에서는 우리가 이른바 재패니메이션이라고 부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자기들의 고유한 방식’을 만들어냈는가. 우리 문화라는 보고에서 무엇을 꺼내어 어떻게 되살려야 하는가? 이 작품 상영 중간에는 1분의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감독이 보너스로 선사하는 잡담시간이다. 이 1분 동안 친구들과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

사진/여섯개의 다른 사랑을 보여주는 <프린스 앤 프린세스>. 고대 이집트부터 서기 3000년 미래까지 넘나들며 기존동화와 민담을 새롭게 조명한다.
그러나 <프린스 앤 프린세스>가 각별히 주목받는 이유는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이유만은 아니다. 창작하는 사람에게 전통문화는 영감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기법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와 함께 <성석전설>(3월24일 개봉, 감독 황치앙화) 역시 전통 인형극 기법을 이용해 만든 작품로, 전통예술의 무한한 변용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먼저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이른바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투명한 배경 위에 종이나 천 또는 나무판으로 만든 평면 인형을 올려놓고 빛을 통과시킨다. 이를 한 프레임씩 찍어서 돌리면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실루엣 애니메이션이 탄생한다. 아드만 감독의 <월레스와 그로밋>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클레이 애니메이션의 특징이 ‘따뜻한 손맛’이라면, 실루엣 애니메이션은 빛과 어두움이 자아내는 고급스런 매력이 특징이다. 실루엣 애니메이션의 모태격인 그림자 인형극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된다. 이중에서도 특히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발견되는 와양(wayang)이 대표적이다. 이미 10세기 이전에 발달한 와양은 힌두교 서사시 ‘마하바라타’ 등을 소재로 삼는 등 종교적 의미까지 지니고 있는 신비스러운 인형극이다. 중국의 그림자극은 당나라 때 시작되어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이어왔다. 와양과 중국의 인형극은 18세기 중엽 유럽인 여행객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이것이 옹브르 시누아즈(ombres chinoises) 즉 중국의 그림자극이라고 불렸는데, 그림자가 주는 무한한 상상력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왕실에서까지 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당시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그림자 전문 극단과 그림자극 전용 극장이 생길 정도였다. 프랑스인인 미셸 오슬로감독은 이러한 그림자 인형극, 즉 옹브르 시누아즈의 영향을 받았다고 짐작된다. 정교한 인형, 땀까지 흘린다

사진/중국의 전통인형극 포대희를 이용해 만든 <성석전설>. 꼬박 3년 걸려 찍었고 제작비도 125억원이 소요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