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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캐릭터오디세이/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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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0-08-09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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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줄리언과 조지, <내가 사랑한 사람>의 니나와 조지

(사진/<내 남자친구의 결혼식>)
우정과 사랑 사이에 자리한 남녀관계는 가파른 비탈길을 양쪽에 끼고 있는 언덕 같은 것이 아닐까요. 자칫 몸을 틀면 평형을 잃고 미끄러지기 일쑤니까요. 보통의 연애에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마음을 다치는 것이 철칙이지만, 이런 관계에서는 상황이 조금 복잡하지요. 한쪽이 사랑을 원하고 한쪽이 우정의 지속을 희망할 경우, 구애를 거절당한 쪽만이 아니라 특별한 우정을 잃은 쪽도 일종의 실연을 당한 것이니까요.

<내 남자친구의 결혼식>의 줄리언(줄리아 로버츠)과 마이클(더모트 멀로니)도 9년 이상 지켜온 ‘우정 이상 사랑 이하’의 자리에서 동시에 굴러 떨어집니다. 그것도 반대 방향으로 말입니다. 뉴욕의 음식 평론가 줄리언은 옛 연인이자 단짝친구인 스포츠 기자 마이클과 언젠가 “스물여덟이 돼도 달리 짝이 없으면 서로 결혼하자”고 약속한 일을 잊지 않았지요. 하지만 그녀가 마이클에 대한 감정을 사랑으로 규정할 즈음, 마이클은 키미라는 귀여운 아가씨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행복에 들떠 알려옵니다. 시카고로 날아간 줄리언은 마이클을 되찾으려는 절박함에 갖가지 어리석은 해프닝을 벌이죠. 그 곁을 지키는 것은 줄리언의 또다른 ‘베스트 프렌드’인 동성애자 남성 조지(루퍼트 에버렛)입니다. 그는 줄리언의 유치한 계략을 위해 가짜 약혼자 노릇까지 멋드러지게 해낸 다음, 쿨한 충고를 선물합니다. “가서 고백해. 그래도 아마 마이클은 키미를 택하겠지. 그럼 넌 식장에 가서 들러리로서 반지를 주는 거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그러려고 여기 온 거잖아.”

그러고보면 현대 영화에서 게이 남성들은, 둔감한 애인에게 지친 이성애자 여성들이 우정보다 진하고 사랑보다 담백한 감정을 나눌 수 있는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주 등장합니다. 하긴 여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육체적 긴장없이 편하게 침대에서 뒹굴면서 같이 TV를 보며 수다떨 수 있는 남자친구를 원해 본 적이 있을 테지요. <내가 사랑한 사람>의 니나(제니퍼 애니스톤) 역시, 애인에게 채이고 그녀의 아파트로 옮겨온 동성애자 교사 조지(폴 루드)에게서 완벽한 단짝을 발견합니다. 부드럽지만 강인한 조지는 실패한 연애담을 들어줄 최고의 말벗이며, 센스있는 쇼핑 친구이며, 훌륭한 댄스 파트너지요. 급기야 니나는 곧 출산할 애인의 아기를 같이 양육할 ‘파트너’로 생부 대신 조지를 원하게 됩니다. 문제는 하나. 니나가 게이인 조지를 남자로서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이지요. 영화 첫머리에 나오는 연극 <인어공주>는 꿈의 왕자님을 만난 대신 고백할 혀를 잘린 니나의 슬픈 운명을 예고한 셈입니다. 니나는 끝내 자신의 사랑이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는 편도 티켓”임을 인정하지만, 그 과정에서 관객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곱씹게 됩니다. 그의 헛된 사랑을 나무라는 언니에게 니나는 항변하지요. “그럼 언니는 형부랑 얼마나 자주 같이 자? 어차피 그렇다면 모든 게 우정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 아니야?” 사랑과 우정의 동기와 결실은 비록 판이할지 몰라도, 진실한 친구와 진실한 연인이 따라야 할 규칙은 비슷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서로 결혼하지 않는다고 해서, 섹스하지 않는다고 해서, 춤을 멈춰선 결코 안 되지.” 피로연장에 외롭게 남은 줄리안에게 다가온 조지는 그렇게 속삭이며 춤을 청합니다. <내가 사랑한…>의 니나와 조지는 각자 다른 연인의 품으로 헤어지고도 사랑하는 사이로 남고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애정에는 여러 형태가 있습니다. 그 사랑의 틀이 명명하기 힘든 것이라 해서, 사회적 효용이 없다 해서 하찮게 여긴다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생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잃어버리게 되겠지요.

필름누에verme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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