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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사람을 닮은 ‘진화적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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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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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경쟁 벌이며 진화하는 컴퓨터 개발… 경쟁·도태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작용

인공지능은 그 단어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컴퓨터가 인공지능을 과연 만들어낼 수 있는가를 따져보는 일은 결국 무엇이 지능인가 하는 정의(definition)의 문제로 회귀한다. 우리는 어떤 놀이에서 교묘한 전술로 매번 이기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지능적인 행동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적당히 져주면서 사람들의 인심을 얻고자 하는 행동은 더 고차원의 지능적 행동일 수도 있다. 따라서 한판 한판의 승패로 지능의 여부를 판단하기가 무척 어렵듯이, 지능적 행동인지 본능적인 행동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직도 ‘컴퓨터 같은 인간’이라는 표현은 어떤 일에 재빠르고 정확하다는 뜻으로 쓰인다. 차라리 ‘여우 같은 인간’이라는 편이 훨씬 더 지능적인 면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지금의 컴퓨터는 속도와 기억 용량의 면에서는 인간보다 빠르지만 넓은 의미로의 지능적인 면에서는 아직 사람에 필적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다양한 모습으로 찍은 사진 더미에서 같은 사람의 사진만을 찾아내는 문제라든지 진맥이나 청진기 소리만으로 환자의 상태를 직관적으로 판단해내는 일 그리고 유려하게 외국어를 번역해내는 일 따위에는 아직 컴퓨터가 사람의 능력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

창의성·유연성 발휘하도록 하는 진화연산


사진/진화연산 기법으로 지능적으로 활동하는 기계장치. 단순한 움직임에서 출발해 갈수록 고도화된 행동을 한다.
이같이 컴퓨터가 사람보다 더 나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분야는 확실한 계산문제이다. 예를 들어 100만에 가장 가까운 소수(prime number)를 찾아내는 문제에는 컴퓨터가 사람보다 수만배 더 빠르지만, 문제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많거나 또 그들간에 서로 복잡하게 얽힌 조건이 주어진다면 이런 유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사람이 더 뛰어나다.

그런데 이런 컴퓨터의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컴퓨터가 사람과 같이 창의성과 유연성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주는 ‘진화연산’(evolutionary computation) 기법이 최근 들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 기법은 미시간대학의 존 홀랜드 교수로부터 1960년에 태동되었다. 지금은 ‘국제 유전-진화 연산 학회’(International Society for Genetic and Evolutionary Computation) 회장인 데이비드 골드버그 교수를 정점으로 많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경쟁적으로 이 방법론이 연구되고 있다.

이 진화적 계산은 전문가의 지식을 컴퓨터에 차용하여 이를 확장하는 기존의 인공지능적 기법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 기법은 거의 지능이라고는 0에 가까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부터 진화를 통하여 고도의 지능적인 결과물로 구성해간다는 면에서 이전의 기법과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해결해야할 문제가 있다고 하자. 이전의 방식은 이 문제에 가장 좋은 해답 하나를 구성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시도를 하겠지만, 진화적 기법은 이 문제에 대한 ‘한심한’ 수준의 무작위 답을 여러 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 한심한 수준의 답을 살펴보면 그래도 그 중에서 몇개 정도는 쓸 만한 것이 있을 것이다. 이들을 골라서 이 해답끼리 적절히 짝을 지어 ‘교배’를 시켜서 자식에 해당하는 새로운 해답을 만들어낸다.

가령 어떤 두개의 쓸 만한 해답에서 장점이 각각 10여개 안팎이 있다면, 그 다음 세대에 만들어지는 해답에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이 좋은 장점이 적절히 들어 있게 된다. 물론 물려받은 장점이 적은 자손은 바로 도태된다. 이 과정은 생물체의 염색체가 서로 뒤섞이는 과정을 프로그램상에서 재현된다. 여하간 이렇게 하면 첫 세대의 시원찮은 해답으로부터 조금 더 진보된 수백개의 새로운 제2세대 해답군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다시 이 2세대 해답군을 다시 교배시켜 더 나은 3세대군을 만들고 이 과정을 계속한다. 우리 인간의 한 세대는 거의 수십년이 지나야 바뀌지만 엄청나게 빠른 컴퓨터에서는 수만개의 집단으로부터 그 다음 세대로 진화를 시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대개 수분 이내에 끝나게 된다.

이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진화하기 위하여 가차없는 생존경쟁이 치러진다. 즉 자식으로 생성된 중간해답들 중 일정 이하의 성능을 보이는 해답은 삭제(도태)된다. 예를 들어 세탁기에서 빨래얼룩을 가장 잘 빼면서 세탁물도 엉기지 않게 하는 배출구의 위치를 찾아내는 일을 이 방법으로 해결해보자. 먼저 약 500개 정도의 개별 세탁드럼에 무작위로 위치를 선택한 몇개의 위치에 물살 배출구를 선정해서 돌려본다. 물론 실제 500개의 세탁드럼에서 이런 작업을 직접 할 수는 없으므로 컴퓨터 내에서 모의실험을 해야할 것이다. 그 500개의 가상의 세탁기에서 최종적으로 세탁되어 나오는 결과물을 기준으로 각 세탁드럼의 성능을 평가해서 전체의 20%에 해당되는 100여개만 살려둔다. 이들 살아남은 100여개의 세탁드럼(중간해답에 해당된다) 집합에서 무작위로 두개씩 짝을 지어 교배를 시킨 뒤에 새로운 자식형 드럼을 만든다.

즉 선택한 두 세탁기에서 설정된 물살배출구가 서로 엇비슷한 위치에 있으면 그것의 위치는 그대로 두고 서로 다른 위치에 있는 배출수는 적절히 무작위로 선택하여 새로운 세탁드럼을 구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세탁드럼은 그 부모격에 해당되는 두 세탁드럼의 구성모양을 약 50% 정도는 닮고 나머지 50% 정도는 자신만이 가지는 독특한 모양을 가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약 200세대 정도 세탁드럼의 진화를 계속하면 나중에 상당히 쓸 만한, 또는 상투적인 방식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가 막힌 모양의 세탁드럼이 생겨날 수 있다.

진화연산 방식은 많은 곳에서 응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스카치 위스키로 유명한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주정회사인 유나이티드 디스틸러(United Distiller)사는 이 방식을 응용하여 새로운 시장에 적합한 각종 원료주정의 배합과 보관, 그리고 생산에 관한 전체 공정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이 진화연산 방식은 새로운 유정탐사와 암진단, 새로운 살균제 개발과 같은, 이전에는 고도의 전문가들만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온 일에 응용되어 놀라운 결과를 보이고 있다.

물론 이 방법이 만능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값비싼 전문인력들이 만들어낸 해결책에 필적할 정도의 대안을 매우 빠르고 싼값에 제공해준다는 면에서 매력이 있다. 그리고 진화의 시작단계에서 무작위가 만들어주는 아주 엉뚱한 상태를 허용함으로써 이로부터 우리가 상상치 못한 아주 독창적인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인간지능의 특징과도 유사하다. 산타페연구소의 멜라니 미첼 교수는 미래에는 결국 이런 식의 인간과 기계의 공생관계가 확립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등과 열등이 공존해야 집단 발전에 기여

사진/로봇이 먹이를 찾아가는 길에도 진화적 기법이 발휘된다.
결국 무자비한 경쟁과 가차없는 도태만이 집단을 발전시키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것을 이 방법은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무조건 우등한 개체만 살려두는 방식보다는 우등한 개체에 아주 적은 수의 열등한 개체를 적당히 끼워넣는 것이 좀더 나은 진화를 유도할 수 있음이 이론과 실험에서 증명되고 있다. 즉 동종의 개체로만 구성된 순수 우등집단은 쉽게 발전의 한계에 도달하는 데 비해서, 적절한 ‘잡음’(noise) 개체가 끼어 있는 집단은 다소 속도는 느리지만 순수 우등집단이 빠지는 정체단계를 빠져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잡음의 양과 질을 결정하는 것이 이러한 전화계산 방법론의 핵심기술이다. 이 사실은 우리네 대학입시에도 많은 점을 시사하고 있다. 오로지 성적 하나만으로 입학생을 선발하고, 그 나머지를 도태시키는 것은 다소 불안전한 진화방법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상이한 종류의 너무 많은 잡음집단을 선발방법의 다양화라는 취지 아래 대학에 마구 섞어두는 것은, 유전 진화연산기법에서 보듯이 전체 군집에 퇴행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조환규/ 부산대 교수·컴퓨터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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