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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선수, 작업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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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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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못할 신선한 웃음의 기억, 성인 시트콤의 가능성을 보여준 <세친구> 종영

사진/4월4일 <세친구> 종영기념식에서 한자리에 모인 출연자들. <세친구>는 안문숙 등 돋보이는 조연을 많이 배출했다.(강창광 기자)
님포마니아(여자 음란증), 트랜스젠더(성 전환자), 관음증, 혼전임신. 한국에서 이 모든 소재를 다루고도 이 문제로 방송위원회에서 징계 한번 먹지 않은 프로그램, 전국의 남성들에게 “선수, 작업 들어간다”라는 말을 가르친 프로그램. 성인 시트콤 <세친구>(문화방송, 월요일 밤 11시)가 그것이다. 그 <세친구>가 4월9일 월요일 57회 ‘마지막 이야기’를, 16일 이제까지의 하이라이트를 방영하면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성인 시트콤 <세친구>는 헬스클럽 강사 윤다훈, 정신과의사 정웅인, 의상실 실장 박상면 등 세 노총각의 이야기다.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공통점밖에 없는 이 세 친구는 능력도 성격도 여자 사귀는 법도 다르다. 천하의 바람둥이 윤다훈, 고지식한 정웅인, 순박하고 무식한 박상면 셋이 좌충우돌 펼치는 30대의 사랑이야기가 <세친구>다. 이 프로그램은 3월12일부터 4월2일까지 시청률 조사결과 전국 평균 가구시청률 25.9%를 기록했다(AC 닐슨 코리아, 전국 5300명 대상).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저렴한 시트콤치고 효자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민감한 소재를 다룰 줄 아는 테크닉

사진/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안연홍은 드디어 윤다훈과 웨딩마치를 올린다.
처음 송창의(48) PD가 성인 시트콤이라는 컨셉을 가지고 <세친구>를 시작할 때는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고 한다. 윗사람에게서도 “성문제를 다루겠다니,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라는 우려의 소리가 들려왔다는 게 감독의 이야기다. 당시로 봐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90년대 중반 이 가족 시트콤의 시장성을 확인해줬고, 90년대 후반 <남자셋 여자셋>이 청춘시트콤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지만, 성인용 시트콤이 시장성이 있는가는 아무도 타진해본 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여대 언론영상학과 주창윤 교수는 오히려 “예견된 성공”이었다고 말한다. 주 교수는 “지난해부터 토크쇼 등을 통해 성에 대한 담론들이 텔레비전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런 전반적인 분위기 속에서 <세친구>가 지상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같은 내용이 3∼4년 전에 방송되었으면 세간의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한 “제작사도 성공 가능성을 알았을 거다. 성(性)을 다루면 일단 주목을 끈다. 단지 윤리논란이 있을 수 있으니까 수위를 어느 선에서 조정하느냐가 관건이었다”라고 덧붙인다.


너무 안 보여주면 성인 시트콤이 아니고 너무 보여주면 욕먹는다는 딜레마 사이에서, <세친구>팀은 제법 줄타기를 잘해낸 것 같다. 성(性)뿐만이 아니었다. 이 귀여운 세 남자들은 때로는 남녀차별적, 국수주의적 발언도 서슴지 않고, 다훈을 사랑하는 안연홍은 라이벌을 저지하기 위해 머리채를 끄잡는 정도의 폭력도 주저하지 않는다. 까딱 발을 헛디디면 보수적인 시청자들과 진보적인 시청자 양쪽을 화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시트콤 <세친구>를 뜯어보면 민감한 소재를 적절하게 다루기 위한 여러 가지 테크닉을 발견할 수 있다. 적절한 선에서 문제를 건드리고 손놓기, 결정적인 말을 피하고 은유 사용하기 등이 그것이다. 47회 ‘오겡끼데스까’는 치고 빠지는 전술로 그런 줄타기를 잘해낸 예 중 하나다. 6년 동안 정웅인을 사모한 일본소녀 니카코는 웅인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온다. 이 점에 감동한 정웅인이 “니카코를 사귈까”하고 친구들에게 의견을 묻자 박상면이 단호하게 화를 낸다. “너 일본여자 사귈 거야? 나 일본은 싫어!” 자칫 국수주의라 비난받을 수 있는 발언으로 시청자들을 얼떨떨하게 한 뒤 <세친구> 제작팀은 숨돌릴 새 없이 웃음의 칼날을 들이댄다. “저, 여기 와리바시 좀더 주세요.” 바로 이어지는 박상면의 대사다. 이처럼 툭 치고 지나가되 문제를 심각한 지경까지 건드리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절묘한 테크닉이다.

의외로 합리적인 성의식

사진/4월16일 막을 내리는 <세친구>. 질질 끌지 않고 인기가 높을 때 끝냈다는 점도 이 프로그램의 미덕이다.
3월 중순 방영된 에피소드 역시 자칫 과격할 수 있는 장면들에 유머러스한 멘트를 넣어 순화했다. 다훈을 차지하려는 연홍은 다훈의 여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배짱을 과시하기 위해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고 술을 벌컥벌컥 마신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문화방송의 프로그램인 <경찰청 사람들>의 형식으로 그려졌다. <세친구> 작가팀의 한 작가는,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니까 분위기까지 그런 식으로 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내용이 혹 폭력적으로 비칠까봐 <경찰청 사람들>식으로 패러디해서 포장했다. ‘관음증에 관한 한 보고서’도 관음증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학술보고서식으로 만들어 분위기를 제어했다”고 밝힌다. ‘관음증에 관한 한 보고서’는 석사논문의 연구대상으로 쓰기 위해 미모의 여자 대학원생 두명이 세 친구를 관음증 중독자로 만드는 내용이다. 이 에피소드는 마치 대학원생의 연구보고서인 양 내레이션을 넣어 제작되었다.

은유를 이용해서 시청자들에게 넌지시 말하는 것도 <세친구>팀이 잘 이용하는 방법이다. 특히 성을 표현할 때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한다. 45회 ‘과거를 묻지 마세요’에서 정웅인은 사귀는 여성 은주가 윤다훈과 미팅에서 만난 것을 알게 된다. 다훈이가 바람둥이라는 것을 아는 웅인은 은주가 다훈과 관계를 가졌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고민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그 지레짐작이 무엇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장면 먹던 다훈이가 웅인을 보고 “이거 먹고 싶어서 그래? 먹을래?”라고 말하자 웅인은 “됐어! 내가 뭐 너 먹던 거 먹는 사람이야!” 하고 화낸다. 얼핏 여자를 음식으로 비유했다고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이 대목은 그러나 ‘자장면 이야긴데’하면 웃어넘길 수 있는 부분이다. 상면은 또 덩치 큰 여성을 집에 데려온 다훈을 보고 “저 자식이 입는 옷은 참 다양해. 스몰 사이즈에서 투 엑스 라지까지! 암튼, 선수는 선수야”하고 감탄하기도 한다(53회 ‘도루묵 인생’). 여기서 옷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다.

여자를 음식으로 비유하는 대사를 고려하면 <세친구>의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성의식은 의외로 합리적인 데가 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편에서 안연홍과 윤다훈이 여관방에서 술마시다 같이 잠들게 된다. 말 그대로 아무 일 없이 잠만 잤을 뿐이지만 연홍은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전전긍긍이다. 그러나 정작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주변 사람들은 “아무 일 없었을 수도 있지 뭐”하고 담백하게 받아들인다. 연홍이와 앙숙인 안문숙이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하고 토를 달자 정웅인은 “안 선생은 자기 앞가림이나 해요”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마지막 회에서 반효정의 혼전임신 사실이 알려지는 장면에서도 등장인물들은 혼전임신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내가 죄인”이라며 고개 숙이는 아기 아버지 최종원에게 상면의 애인 은숙은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무슨 흉이라구요!”라고 말한다.

흔해빠진 해피엔딩을 거부하다

요 한달여 <세친구>의 짜임새는 힘이 빠진 감이 있었다. 줄거리를 마무리 짓기 위해 이야기를 무리하게 진행시킨 탓이다. 그러나 셋 다 자기짝을 만나 행복하게 산다는 흔해빠진 해피엔딩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 시트콤의 개성은 뚜렷하다. 상면은 누나가 임신하는 바람에 결혼을 미루게 되고, 바람둥이 다훈은 안연홍과 화촉을 밝힌다. 반면 외형적으로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춘 정웅인이 결혼을 못하게 된다는 것, 그것도 파혼 이유가 연인간의 사랑싸움이 아니라 애인 민희가 알고보니 레즈비언이었다는 설정은 그야말로 <세친구>답다 할 수 있다.

<세친구>의 작가 중 한명인 목연희(32)씨는 “‘<세친구>가 성인 시트콤의 장을 열었다’, 뭐 그런 거창한 표현으로 시청자들이 기억해주는 걸 바라지 않는다. 그냥 ‘내 친구 이야기가 떠오르는 프로그램이었다’라고 기억해줬으면 한다”고 말한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세친구>가 시청자들에게 선사한 새로운 웃음의 기억은 윤다훈이 잘 쓰는 말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이민아 기자 mi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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