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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여자가 없으니 울지도 못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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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24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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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풀어내는 탁월한 ‘기호학자들’, 이현승의 ‘결혼한 여자들’과 황병승의 밥 말리 제목 해석

▣ 신형철 문학평론가

사랑에 빠지면 탐정이 된다. 왜? 나의 연인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내가 해독해야 할 ‘기호’들을 방출하는 생명체다. 미묘하게 흔들리는 눈빛, 평소와는 다른 어색한 미소, 어쩐지 나를 밀어내는 듯한 말투. 젠장, 도대체 이 기호들은 뭘 뜻하는 거야!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우리가 연인이 방출하는 기호 앞에서 안달하는 이유는 그것이 어떤 ‘가능세계’의 존재를, 즉 내가 모르는, 그러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한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그 무슨 추억 따위를 늘어놓은 책이 아니라 한 남자가 평생 동안 ‘기호’를 해독해나가는 이야기라는 것. 내가 모르는 그녀만의 세계가 있다고? 그런 거, 인정하고 싶지 않다.

(사진/ 연합)


“나는 그 여자가 혼자/ 있을 때도 울지 말았으면 좋겠다/ 나는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여자의/ 울음을 생각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여자의 울음은 끝까지/ 자기의 것이고 자기의 왕국임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러나 그 여자의 울음을 듣는/ 내 귀를 사랑한다”( ‘그 여자의 울음은 내 귀를 지나서도 변함없이 울음의 왕국에 있다.’ 전문) 정현종의 초기 시집 <고통의 축제>(민음사, 1974)에서 골랐다. 사내에게 여인의 눈물만큼 난해한 기호가 또 있을까. 그 기호의 가능세계가 얼마나 커 보였던지 청년 정현종은 ‘왕국’이라는 말까지 동원했다. 여자의 왕국이 끝내 나를 밀어내고 있으니 난감하지만, 그나마 그 울음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으니 다행이라는 것. 특유의 낙천주의다. 이 시를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다음 시 때문이다.

“정원사와 결혼한 여자가 있어요/ 또 짐꾼과 결혼한 여자가 있지요/ 수다쟁이와 결혼한 여자도 있구요/ 모두 말이 없군요/ 너무 고여 있었어요/ 가끔씩 소리 내어 울지만/ 모여서 울지 않아요// 여자들이 깜짝깜짝 놀랄 때마다/ 나는 경계심에 대해 생각해요/ 깜짝 놀란다는 건/ 아무래도 너무 외롭지 않아요?”(‘결혼한 여자들’ 전문) 이현승의 첫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랜덤하우스, 2007)에서 골랐다. 좋은 시에는 어떤 ‘무덤덤한 발견’의 순간이 있다. 결혼한 여자들은 왜 모여서 울지 않는가. 깜짝깜짝 놀라는 여자들은 왜 외로워 보이는가. 이쯤 되면 기호 해독에 소질이 있는 사내 아닌가. 청년 정현종보다는 ‘울음의 왕국’속으로 한발 더 들어간 듯 보인다.

남자의 눈물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자. 밥 말리의 노래 〈No woman no cry〉가 생각난다. 내용상으로는 ‘마오, 여인아, 울지를 마오’라는 뜻이다. 제목만 떼놓고 보면 ‘여자가 없으면 눈물도 없다’도 되고 ‘여자가 없으니 울 일도 없다’도 되니 재미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시인 황병승의 해석이다. “혹시 자넨, 노 워먼 노 크라이라는 말을 해석해본 적이 있나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네 ‘여자가 없으니 울지도 못하겠네’ 잘 있게나 친구 아직도 오늘 밤이군”(‘사성장군협주곡’에서) 왜 아니겠는가. 천운영의 소설에 “여자의 눈물은 원초적으로 남자를 향한 거거든”(‘그녀의 눈물 사용법’)이라는 문장이 있지만, 남자의 눈물도 여자라는 관객이 없으면 쉽게 무대에 오르지 않는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자 역시 언젠가 한 여인 앞에서 눈물이라는 기호를 방출한 적이 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려 하고 또 압력을 가하고자 한다. 당신이 내게 한 짓을 좀 보세요.”(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에서) 실로 그런 취지였는데 결과는 반대였다. 그녀는 사려 깊은 탐정이 되어 나의 기호를 해석하지 않고 외려 판사가 되어 제 마음을 땅땅 정리해버렸다. 그래서 얻게 된 교훈. ‘당신에게서 마음이 떠나려 하는 연인 앞에서 울지 마라. 이별의 시간이 더 빨라질 것이다.’ 그런데 지행일치가 잘 안 되어서 그 뒤에도 자주 울었다.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린다.”(앞의 책) 그래, 그래서 울었던 거겠지.

남자도 울고 여자도 울고,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다. 참 빤하고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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