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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길티 플레저’의 유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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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17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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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때마다 주책없이 설레는 <빨강머리 앤> 시리즈, 여자애들은 그냥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가 있는 법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영어에 ‘guilty pleasure’(길티 플레저)라는 표현이 있다. 우리말로 단박에 옮기기 애매한 이 표현은 ‘남에게 보여주긴 창피하지만 비밀리에 탐닉하는 무언가’를 뜻한다. 예를 들어 반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우리 남편은 어느 프라모델 회사에서 전쟁 마니아들을 위해 특별히 발간한 <제2차 세계대전사> 시리즈 전 5권을 고이 모셔놓고 생각날 때마다 탐독한다. 박완서 소설은 아무리 권해도 안 읽던 어머니는 대여점에서 빌려온 김수현의 <겨울새>를 밤새워 읽어버리는 뜻밖의 저력을 보였고, 만화책을 비롯해 1년에 책 한 권 읽을까 말까 싶은 남동생은 가끔 내 책꽂이에서 기욤 아폴리네르의 <돈 후안>이나 <채털리 부인의 사랑>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같은 책만 귀신같이 골라 빼가곤 했다.

빨강머리 앤


나 역시 그런 면으로 치면 만만치 않다. 학력고사 이틀 전까지도 할리퀸 시리즈를 하룻밤에 두세 권씩 독파한 이력이 있고, 중·고등학교 때 용돈을 아껴가며 사모았던 책들은 청소년용 세계명작 도서가 아니라 ‘파름문고’나 여학생사에서 발간한 <마지막 여름> <내 이름은 마야> 같은 성장소설을 빙자한 연애소설들이었다. 그래,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삼류 연애소설이었대도 나 할 말 없다.

그 시절 그렇게 닥치는 대로 읽은 책들 중에 아직도 내가 고이 소장하고 있는 책, 그리고 아직도 읽을 때마다 여전히 은밀한 기쁨을 느끼는 책은 <빨강머리 앤> 시리즈다. 삼십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앤이 길버트와 토닥대다가 연애하게 되는 이야기며, 프린스에드워드 섬 사람들의 순박한 사연이며, 자연 풍광을 묘사한 대목들을 읽을 때마다 주책없이 가슴이 설렌다.

<빨강머리 앤>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을 빼놓을 순 없다. 어쩌다가 일본 소녀들의 가슴에 빨강머리 앤의 ‘로망’이 자리잡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희한하게도 ‘빨강머리 앤 산업’을 만든 것은 본고장인 캐나다가 아니라 일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물론이고, 저자의 고향이기도 한 프린스에드워드 섬에는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빨강머리 앤’ 투어가 있으며, 90년대 캐나다에서 TV시리즈가 제작됐을 때도 역시나 가장 인기리에 방영된 곳이 일본이었다. 한국에 어학강사로 와 있던 어느 캐나다인에게서 <빨강머리 앤>에 대한 일본인들의 극진한 애정은 캐나다인들 사이에서도 종종 농담 삼아 회자되는 주제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런 현상을 보고 있으면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찔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 폭의 수채화 같은 <빨강머리 앤>에 대한 내 사랑은 결코 변치 않는다. 고아 소녀 앤의 이야기는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거듭나는, 모든 소녀들의 꿈의 이야기이다. 때로는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는 소소한 고난들이 있지만, 이런 해묵은 원한이나 사랑싸움은 결국 아름다운 자연과 순박한 공동체의 상식 안에서 저절로 해결된다.

물론 당시의 ‘바람직한 여성’의 자질을 내면화하려는 기제들이 눈에 걸리기도 하고, 비슷한 시대를 그린 같은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일명 그레이스>(Alias Grace)같은 삭막한 책을 떠올려보면, 과연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살았던 19세기 캐나다 사회가 이렇게 착하고 순수한 모습이기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쥘 베른의 <십오 소년 표류기>나 헨리 라이더 해거드의 <그녀> 같은, 제국주의를 바탕으로 한 19세기 모험소설들을 다시 읽을 때의 찝찝함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애교다.

로망은 로망일 뿐. 하지만 신디 로퍼의 노래가사처럼, 여자애들은 그냥 재미를 느끼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부푼 소매라든가, 비밀 이야기 클럽, 케이크에 바닐라 대신 들어간 진통제 따위의, 남자아이들은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통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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