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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질투는 진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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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1-03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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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투하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다”…연인은 왜 비극적 종말로 이끄는 질투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 바이오및뇌공학과 교수

“오! 왕이시어, 질투를 주의하옵소서.
이는 거짓을 행하는 녹색 눈의 괴물입니다.
그리고 고기를 먹고 살죠. 아내의 부정을 모르는 남편은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자신의 운명을 확신하는 사람은 자신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죠.
오, 하지만 시간이란 얼마나 야속한지!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은 마음 한구석 의심이 있고,
의혹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사랑을 불태우니!”


질투는 역설적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데 그것이 사랑을 비극적 종말로 이끌 수 있다. 뭉크의 그림 <질투>.

셰익스피어가 쓴 비극 <오셀로>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베니스의 용병장군 오셀로와 그를 사랑해 비밀 결혼식을 올리는 데스데모나, 그리고 그들의 사랑을 파국으로 이끌 음모의 모략꾼 이아고. 이들의 질투와 배신, 그리고 살인과 파국을 그린 작품 <오셀로>는 사랑의 어두운 뒷면인 ‘질투’라는 열정이 얼마나 파괴적인가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jalousie’ 뒤에 숨어 지켜보다

과학자들은 질투를 ‘배우자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배우자가 제3자와 관계를 맺었거나 맺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표현되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건조하게 정의하는데, ‘사랑에서 비롯되어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야기되는 감정’이라고 소박하게 정의한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랑에 빠진 인간에겐 두 가지의 위험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하나는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거나 성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성적 배신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적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자를 의심하는 질투라는 욕망이다. 질투를 뜻하는 영어 ‘jealousy’는 라틴어 ‘zelosus’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열정과 강한 욕망’이라고 한다. 프랑스어로 질투를 뜻하는 ‘jalousie’는 질투라는 뜻과 함께 커튼 대신 사용하는 창 가리개인 ‘베네치아 블라인드’라는 뜻이 포함돼 있는데, 그 해석이 흥미롭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의 정신과 의사인 닐스 레터스톨은 이것이 아내를 의심하게 된 남편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성관계를 갖는 현장을 잡으려고 블라인드 뒤에서 몰래 훔쳐보는 상황에서 생겨났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발견되는 이 쌍둥이 열정은 ‘질투’라는 단어의 어원에도 잘 나타나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질투라는 감정에 사로잡힌 적이 있을 것이다. 미국 텍사스주립대 진화심리학자 데이비스 버스가 수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거의 모든 남녀가 인생에서 최소한 한 번씩은 ‘격렬한 질투심’을 경험했다고 대답했다. 전체의 31%는 ‘때로 질투심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고 털어놓았으며, 현재 질투심을 느끼고 있다고 답한 사람들의 38%는 그 질투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고 답하기도 했다. 질투가 얼마나 보편적이며 파괴적인가를 잘 보여주는 설문 결과다.

앞서 언급한 오셀로의 한 대목은 ‘질투가 얼마나 역설적인가’를 잘 포착하고 있다.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46%는 ‘질투는 진정한 사랑에 필수적으로 수반된다’고 응답했다. 다시 말해 “질투를 느끼지 않는다면 사랑하지도 않는 것”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다는 얘기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질투가 사랑의 깊이를 말해주는 표시라고 여기며, 사랑이 없다면 질투도 없다며 질투를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다. 아내를 죽인 혐의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미국의 미식축구 선수 O. J. 심슨도 “제가 그런 일을 저질렀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제가 아내를 몹시 사랑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라고 말했다는데, 이런 말은 의심과 질투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똑같이 하는 말이다.

질투가 역설적인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를 하는데 그것이 사랑을 비극적 종말로 이끌 수 있다는 데 있다.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살인 사건의 13%는 배우자 살해이며, 그중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질투다. 결혼한 부부 사이에 과도하게 보이는 배우자 의심 증세를 ‘오셀로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부부편집증이라고도 하는 이 병리적 상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흔하게 발견된다. 실제로 배우자가 바람을 피웠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오셀로 증후군 환자들은 정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질투와 의심’에 시달린다.

일단은 의심하는 게 진화에 유리해

흥미로운 것은 오셀로 증후군에 걸린 사람들이 배우자로부터 얻는 불확실하고 애매한 단서들을 잘 포착해서 그들의 부정을 놀랍도록 잘 감지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지만, 오셀로 증후군 환자들의 병적인 의심이 항상 망상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사랑하는 관계를 위협할 수 있을 만큼 파괴적인 ‘질투’라는 속성을 갖게 되었을까?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데이비드 버스 교수는 그 원인을 자신의 책 <위험한 열정 질투>(추수밭 펴냄, 2006)에서 산책하는 사람들에 비유해 설명하고 있다. 숲 속을 산책하다가 앞쪽 오솔길에서 무언가 미끄러지듯 지나가는 것을 감지했다고 치자. 그것이 독을 품은 뱀일 수도 있고, 뱀이 아닌 다른 것을 뱀으로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는 불완전하고 모호한 정보를 바탕으로 추론을 해야 하다 보니, 실제로 뱀 따위는 없는데 있다고 믿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고, 정말로 위험한 뱀이 버티고 있는데 없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오류가 치러야 할 대가는 매우 다르다.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우리 조상들은 이런 상황을 수십만 번 치렀을 텐데,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런 불확실한 상황에서 ‘뱀이 존재한다’고 추론했던 조상들로부터 태어난 사람들이다. ‘뱀이 아니겠지’라고 의심하지 않았던 조상들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겼겠지만,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불행으로 인해 우리를 태어나게 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을 과학자들은 ‘적응적 오류’라고 부른다.

바로 이렇게 질투는 ‘낮은 확률일지라도 일어날 수 있는 성적 배신의 가능성에 대비한다’는 점에서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유리하다. 무고한 배우자와 다투면 연인 관계가 깨질 수도 있기에 확실히 손해라고 볼 수 있지만, (너무 지나치지만 않는다면) 배우자가 내게 좀더 충실하게끔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아주 작은 단서로도 배우자의 부정을 추론하게끔 적응적 해결책을 마련해주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자들이 질투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내가 더 관심이 있는 것은 ‘그렇다면 왜 사람마다 질투의 정도가 다를까’ 하는 것이다. 질투가 성적 배신을 막는 데 유용한 전략이라면 왜 사람마다 그 정도가 다른 것일까? 질투가 적은 사람은 성적 배신에 너그러운 것일까? 아니면 자신도 성적 배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죄책감으로 인해 좀더 관대한 것일까?

질투는 성적 배신을 막으려는 이성적 전략이기도 하지만, 성적 배신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배우자의 바람기가 심각한 수준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할수록 질투심이 커질 수 있다는 얘기다.

질투하는 사람은 네 번 괴롭네

롤랑 바르트는 자신의 에세이 <사랑의 단상>에서 질투하는 사람은 네 번 괴로워한다고 쓰고 있다. ‘질투하기 때문에 괴롭고, 질투한다는 사실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 때문에 괴롭고, 내 질투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까봐 괴롭고, 또 통속적인 것의 노예가 돼서’ 괴로워진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자신을 ‘초록 눈의 괴물’로 만드는 질투가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 기형도는 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서 ‘질투는 나의 힘’이지만,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고 고백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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