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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다른 박찬호가 꿈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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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1-04-10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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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수에 얽매이지 않고 하나의 공에 집중… 정신적 무장으로 원대한 목표에 다가서

사진/990만달러에 계약을 한 뒤 가진 공식 인터뷰 모습.
LG 출신의 김용수(41)씨가 LA다저스의 스프링 캠프지인 플로리다 베로비치에서 코치 연수(마이너리그)를 받고 있다. LA다저스의 박찬호(28)는 지난 스프링캠프 기간 중 기회있을 때마다 그를 찾았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박찬호가 김씨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을 찾아 갔다. 바로 그날, 메이저리그 야구 전문 주간지인 <베이스볼 위클리>가 뜻밖의 전망을 내놓았다. 박찬호가 LA다저스의 에이스 케빈 브라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의 랜디 존슨,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케빈 밀우드와 함께 2001시즌 내셔널리그 다승 공동 1위에 오를 것이라는 분석이다. 승수는 18승. 이날, 박찬호를 취재하고 있던 한국기자들조차 깜짝 놀랄 소식이었다. 과연 박찬호가 그 정도 급인가. 지난해 18승(10패, 방어율 3.27)을 거두었지만 메이저리그 전문가들이 박찬호를 올 시즌 내셔널리그 다승 공동 1위 후보에 올려놓은 것은 다소 의외였던 것이다.

연봉 재계약 과정부터 치밀하게 준비


사진/플로리다 베로비치에서 훈련을 마치고 몸을 풀고 있다(위).박찬호 스승 중 한명인 데이브 워러스 단장 보좌역 겸 투수코치와 똑같은 자세로 야구 얘기를 하는 모습(가운데).데이브 월러스 코치와 투구 밸런스를 훈련하고 있다(아래).
그날, 김용수씨와 박찬호가 나눈 대화의 첫 화제는 당연히 <베이스볼 위클리>의 분석이었다. 김씨가 “대단하네”라고 말하자 박찬호는 태연하게 “왜 다승 공동 1위입니까. 그러면 내가 20승을 하면 단독 1위가 되겠네”라며 웃었다. 예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여유이다.

보통 박찬호는 승수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 무조건 피한다. 그 이유에 대해 박찬호는 “몇승에 대한 것을 입 밖에 내놓으면 그것이 팬들에게 알려지고, 그 순간부터 나는 그 숫자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말을 한 이상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마음속에 승수에 대한 목표가 있지만 공개적으로 밝히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박찬호의 올 시즌 목표가 20승일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박찬호 자신이 직접 비록 농담처럼이라도 20이라는 수를 꺼내놓은 것은, 이날 김용수씨의 집에서 단 한번밖에 없었다. 박찬호가 매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목표는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한 시즌을 마치고 싶다. 수준급의 선발투수 구실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는 정도였다. 수준급의 선발투수 구실은 6이닝을 던져 3실점 이내로 막는 것을 의미하며, 이를 흔히 퀄리티 스타트(quality start)라는 표현을 쓴다. 올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박의 준비는 치밀했다. 이는 지난 1월에 있었던 박찬호의 연봉 재계약에서부터 엿볼 수 있었다. 박찬호는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가 LA다저스 구단과 1년에 990만달러에 합의하고 승인을 요청하자 “왜 990만달러냐”를 묻지도 않고 OK사인을 보냈다. 스콧 보라스가 고객(박찬호)의 허락을 얻기 위해 아침에 전화로 찾았을 때 박찬호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베벌리힐스 집 인근 대학 구장에서 개인 훈련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콧 보라스가 겨우 연락을 해 승인을 얻은 뒤 LA다저스 구단에 자랑스럽게 한 얘기가 “내 손님은 계약에 신경도 쓰지 않고 훈련에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박찬호가 990만달러에 쉽게 계약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적어도 1천만달러를 넘겨야 계약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자신보다 성적이 훨씬 못 미치는 동기생 대런 드라이포트가 1년 일찍 자유계약 선수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5년간 5500만달러, 평균 연봉 1100만달러에 장기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박찬호는 1996년 풀타임 메이저리거가 된 이후 단 한번도 대런 드라이포트보다 적은 연봉을 받아본 적이 없다. 2000시즌 박찬호는 18승, 대런 드라이포트는 12승을 올렸다. 통산 성적도 2000시즌까지 박찬호가 65승43패, 대런 드라이포트는 39승45패로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그러나 박찬호는 990만달러에 군말없이 사인했다. 물론 990만달러는 박찬호와 같은 메이저리그 5년차 이상 투수가 1년 계약으로 받은 연봉 가운데 메이저리그 최고 기록이기는 하다. 박찬호는 계약을 한 뒤 “990만달러도 많은 돈 아니냐”며 만족한다고 밝혔다.

훈련 이외의 것에 관심 기울이지 않아

사진/다저스타디움 외벽에 올 시즌 새로 붙여 놓은 황색 배경의 박찬호 사진.
기실 그의 속마음은 딴 데 있었다. 박찬호는 계약에 신경을 쓰다가 1999시즌을 13승11패, 방어율 5.23으로 망쳐버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1997시즌 14승, 1998년 15승으로 상승세를 탔던 그가 20승 가까이를 해보겠다고 다부지게 덤볐던 그해, 시즌 초반에 논의됐던 장기 재계약에 신경을 쓰다가 13승에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박찬호는 대외적으로 과시하기에도 그럴듯한 1천만달러 연봉을 겨우 10만달러의 차이에서 쉽게 체념했다. 훈련 이외의 것에 단 1%의 신경도 쓰지 않고 2001시즌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만일 박찬호가 에이전트 스콧 보라스에게 10만달러를 채워달라고 했다면 시간은 걸렸겠지만 성사가 됐을 것이다.

박찬호가 2월 중순 시작돼 3월 말에 끝난 플로리다 베로비치 스프링캠프에서 한 것은 두 가지였다. 투구훈련과 영어공부이다. 다른 동료보다 1시간30분 먼저 다저타운으로 와 개인 훈련을 했고 훈련이 끝나면 1시간 더 다저타운에 남아 한 미국인 할머니로부터 영어 개인 교습을 받았다.

스프링캠프 기간 중 LA다저스 코치들이 박찬호에 대해 가장 신경을 쓴 일은 지나친 훈련을 막는 것이었다. 박찬호가 혼자 다저타운 밖으로 장거리 러닝을 나갔다가 쥐가 나서 쓰러져 차에 실려 온 기억들이 모두에게 남아 있다. 적어도 박찬호에 관해서는 코치가 하는 일이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막는 것이었다.

여하튼 올해 박찬호에 대한 전망을 밝다. 그렇다면 그같은 전망을 밝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즉 지난해에 견줘 달라진 박의 면모는 무엇인가.

사실 박찬호가 18승을 거둔 2000시즌과 비교해 올해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신무기도 장착하지 않았다. 다만 짐 콜번 신임 투수코치 등과 편하게 의견을 교환하며 체인지업, 커브 등을 다듬었을 뿐이다. 갑자기 공이 빨라지는 법도 없으니 박찬호가 야구기술상 새롭게 보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짜 달라진 게 있다. 바로 정신적인 측면이다. 이 점에서 박찬호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공 하나에 대한 집중력이 예년과 비교해볼 때 배 이상 강해졌다. 최근 박찬호는 베로비치에서 승용차로 한 시간 거리인 멜번에 있는 자장면을 파는 한국식 중국집에서 김용희 전 롯데 감독과 저녁식사를 한 적이 있다. 이날 저녁 자리를 끝낸 뒤 자리를 함께했던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한 얘기가 ‘박찬호가 야구얘기를 저렇게 많이 한 것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대형 타자 출신인 김용희 전 감독도 박찬호의 투수론에 대해 상당히 공감한 듯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공을 원하는 곳에 던지면 승수는 쌓인다

박찬호가 말하는 투수론은 바로 ‘공 하나 이론’이다. 공 하나를 자신이 계획했던 대로, 원하는 곳에 정확하게 던지는 것으로 투수가 할 일은 끝난다는 것이 박찬호의 생각이었다. 홈런이 될 수도 있고 삼진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결과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투수가 제어할 수 있는 영역 밖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설명이다. 자신이 계획했던 공이 제대로 들어가면 그것으로 끝(That's it)이라고 박찬호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말대로라면 박찬호는 이미 승패의 결과를 떠난 투수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날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 어떻게 공 하나에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느냐고. 혹시 안타를 맞지 않을까 두려울 수도 있고, 승패에 신경이 쓰일 수 있고, 야구 이외의 생각이 문득 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박찬호는 이렇게 답했다. “다른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면 오히려 더 생각이 난다. 그러니까 나는 잊으려고 하지도 않고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공 하나에만 계속 집중하면 다른 것들을 저절로 잊게 된다”고 말했다.

사실 올 시즌 박찬호가 어떤 성적을 낼지 지금은 아무도 알 수 없다. 모른다. 그러나 엄청나게 달라진 공 하나에 대한 집중력이 올해 박찬호를 20승 투수로 이끌어갈 가능성이 크다는 게 박찬호 자신은 물론 많은 이들의 생각이다.

장윤호/ 일간스포츠 LA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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