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을 읽으며 홈에버 40대 여성 가장들을 떠올리다
▣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나는 2000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직장이라는 걸 가졌다. 시에서 운영하는 사단법인인 그곳에는 4명의 정규직과 4명의 비정규직이 있었다. 4명의 정규직은 늘 따뜻한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고 동절기면 오후 5시에 퇴근했다. 4명의 비정규직은 온종일 외근을 하고 돌아와 서류를 정리하고는, 잔업이 있으면 10시고 11시고 상관없이 또다시 현장에 나갔다. 그러고서 정규직의 절반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았다. 같은 연예인에 열광하는 20대 중·후반의 또래였지만 4명과 4명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는 월급봉투가 두꺼운 쪽이었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8명의 인건비에 대해. 정규직 수당 중 얼마라도 비정규직에게 돌릴 길이 없는지에 대해. 시의 공무원들과도 이야기해보았다. 정직원 자리를 하나 늘리는 건 한 대에 7천만, 8천만 원 하는 장비를 구입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나와 비정규직인 한 친구는 노조 설립을 의논하려고 민주노총 사무실을 찾아갔다. 우리는 망설였고, 결국 노조를 만들지 못했다. 나는 한 달 뒤면 조직을 떠날 거라는 핑계를 대고, 친구는 남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내가 가진 것 중 몇 개를 내어주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없는 자의 편이 되는 것은 늘 없는 자이지, 조금이라도 가진 자가 아니다. 물론 정규직이 임금 동결에 동의한 덕분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부산은행과 같은 예외도 있다.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 펴냄)은 뛰어난 동화들이 그렇듯, 여러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엄마들은 모성의 위대함을, 취업준비생들은 진정한 자아실현의 용기를 읽을 수도 있고, 수행평가의 압박에 시달리며 책을 집어든 초등학생이라면 독후감에 ‘안구에 습기 찼다’는 소감- 실제로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내용이다- 말고 뭘 덧붙일지 고민스럽기만 한 텍스트일 수도 있다. 매일 철망 안에서 힘없이 피 묻은 알을 낳던 난종용 암탉 ‘잎싹’은 문득 알을 품어 병아리를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다. 마당을 나오려는 그의 야망은 거창한 존재론적인 질문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삶은 소망을 가진 자에게 유독 더 냉혹하다. 함께 나눌 수 없는 마당을 나온 암탉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호시탐탐 노리는 족제비에게 쫓긴다. 알을 낳지 못하는 그는 친구인 청둥오리의 알을 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마당의 주인을 자처하는 수탉과 씨암탉은 같은 닭이지만 이런 잎싹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잎싹을 보듬어주는 건 가진 게 없기는 마찬가지인 청둥오리 ‘나그네’뿐이다. 온통 대선과 서해안 기름 유출 사건으로 한 해가 끝나는 이 시점에 이랜드 파업은 어찌 되었을까. 이제 그들은 명동성당 ‘마당’ 한구석에 정말 어렵사리 자리잡고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정권이 바뀌고, 그래서 경기가 좋아지고 파이가 커지면, 정말로 그들도 살 만해질까? <마당을 나온 암탉>을 다시 읽다가, 나는 잎싹의 모습에서 파업이란 건 생전 남의 일인 줄 알았다던 홈에버의 40대 여성 가장들을 떠올렸다. 가진 것을 나누지 못했던 나는 씨암탉의 눈치나 보며 마당 한구석에 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비겁한 집오리들과도 같았다. 동화를 너무 전투적으로 읽은 것 같아, 작가에게도 그리고 이 훌륭한 책을 미처 읽지 못한 독자에게도 미안하다. 하지만 고전에는 어떤 식으로 읽어도 여전히 감동과 울림을 전하는 튼튼한 맷집이 있는 법. 모성애든 자아실현이든 자유와 평등이든 간에 읽고 ‘감동’ 받으시라. 다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실천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도 좋은 일 아닌가. 어른이 뒤늦게 동화를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나는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8명의 인건비에 대해. 정규직 수당 중 얼마라도 비정규직에게 돌릴 길이 없는지에 대해. 시의 공무원들과도 이야기해보았다. 정직원 자리를 하나 늘리는 건 한 대에 7천만, 8천만 원 하는 장비를 구입하는 것보다 어려웠다. 나와 비정규직인 한 친구는 노조 설립을 의논하려고 민주노총 사무실을 찾아갔다. 우리는 망설였고, 결국 노조를 만들지 못했다. 나는 한 달 뒤면 조직을 떠날 거라는 핑계를 대고, 친구는 남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내가 가진 것 중 몇 개를 내어주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없는 자의 편이 되는 것은 늘 없는 자이지, 조금이라도 가진 자가 아니다. 물론 정규직이 임금 동결에 동의한 덕분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부산은행과 같은 예외도 있다.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황선미의 <마당을 나온 암탉>(사계절 펴냄)은 뛰어난 동화들이 그렇듯, 여러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엄마들은 모성의 위대함을, 취업준비생들은 진정한 자아실현의 용기를 읽을 수도 있고, 수행평가의 압박에 시달리며 책을 집어든 초등학생이라면 독후감에 ‘안구에 습기 찼다’는 소감- 실제로 인터넷 서점에 올라온 내용이다- 말고 뭘 덧붙일지 고민스럽기만 한 텍스트일 수도 있다. 매일 철망 안에서 힘없이 피 묻은 알을 낳던 난종용 암탉 ‘잎싹’은 문득 알을 품어 병아리를 키우고 싶다는 소망을 갖는다. 마당을 나오려는 그의 야망은 거창한 존재론적인 질문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런 가장 단순하고 기본적인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삶은 소망을 가진 자에게 유독 더 냉혹하다. 함께 나눌 수 없는 마당을 나온 암탉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호시탐탐 노리는 족제비에게 쫓긴다. 알을 낳지 못하는 그는 친구인 청둥오리의 알을 품으며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마당의 주인을 자처하는 수탉과 씨암탉은 같은 닭이지만 이런 잎싹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잎싹을 보듬어주는 건 가진 게 없기는 마찬가지인 청둥오리 ‘나그네’뿐이다. 온통 대선과 서해안 기름 유출 사건으로 한 해가 끝나는 이 시점에 이랜드 파업은 어찌 되었을까. 이제 그들은 명동성당 ‘마당’ 한구석에 정말 어렵사리 자리잡고 장기농성에 들어갔다. 정권이 바뀌고, 그래서 경기가 좋아지고 파이가 커지면, 정말로 그들도 살 만해질까? <마당을 나온 암탉>을 다시 읽다가, 나는 잎싹의 모습에서 파업이란 건 생전 남의 일인 줄 알았다던 홈에버의 40대 여성 가장들을 떠올렸다. 가진 것을 나누지 못했던 나는 씨암탉의 눈치나 보며 마당 한구석에 사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비겁한 집오리들과도 같았다. 동화를 너무 전투적으로 읽은 것 같아, 작가에게도 그리고 이 훌륭한 책을 미처 읽지 못한 독자에게도 미안하다. 하지만 고전에는 어떤 식으로 읽어도 여전히 감동과 울림을 전하는 튼튼한 맷집이 있는 법. 모성애든 자아실현이든 자유와 평등이든 간에 읽고 ‘감동’ 받으시라. 다만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하고 실천하고 싶어진다면 그것으로도 좋은 일 아닌가. 어른이 뒤늦게 동화를 읽을 때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