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10년 전 최갑수의 ‘밀물여인숙’과 2007년 안시아의 ‘파도여인숙’
▣ 신형철 문학평론가
남자가 혼자 여행을 떠날 때, 짐짓 심각한 척하지만 그 천진한 속을 누가 모를까. 실은 가슴이 허해서 애가 닳아 있는 것이다. 여행길 어느 모퉁이에서 익명의 여인을 만나 그 허한 속 한 번 채워보려는 것이다. 작가들이 그토록 우려먹은 ‘여행의 서사’에는 이런 판타지가 깔려 있다. 예컨대 우리네의 걸작으로는 <무진기행>(김승옥)이 있고 여성작가의 우아한 반격으로는 <하나코는 없다>(최윤)가 있는 터다. 책임질 일 없어서 달콤하고 일시적이어서 뜨겁지만, 결국에는 허한 속 다시 붙안고 돌아오는 민망한 사내들의 이야기. 비근한 사례로 시 쪽에는 ‘여인숙의 서정’이 있다.
“창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 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움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 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 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른다// 그 여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로/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밀물여인숙3’ 전문) 꼭 10년 전에 이런 시를 들고 최갑수라는 시인이 나타났다. 당시 25살이었다. 그 나이에 이런 가락이라니. 세 살 아래인 어느 독자에게 이 시의 정서는 징그럽고도 탐나는 것이었다. 여인은 상처를 헤치며 약을 털어넣고, 사내는 그 여인의 몸에 한 시절 의탁해보려고 궁리 중이다. 못난 여인과 못난 사내인 게 분명한데, 자꾸만 이 쓸쓸한 풍경에 마음이 쓸리는 것이다(이 시는 3년 뒤에 시인의 첫 시집 <단 한 번의 사랑>(2000·문학동네)에 실린다). 새삼 이 시를 떠올리게 한 것은 어느 젊은 시인의 시였다.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요?/ 창문마다 네모랗게 저당 잡힌 밤은/ 가장 수치스럽고 극적이에요/ 담배 좀 이리 줘요/ 여기는 바다가 너무 가까워요/ 이 정도면 쓸 만하지 않나요?/ 다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 끄덕이지 말아요/ 창밖으로 수평선이 넘치고/ 아 이런, 술잔도 넘쳤나요/ 오래될수록 좋은 건 술밖에 없어요/ 갈 곳도 없고 돈도 없다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요?/ 부서지기 위해 밀려온 파도처럼/ 이곳까지 떠나온 게 아니던가요/ 여긴 정말 파도 말고는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큰 눈을 그리 끔벅대는 거예요/ 파도처럼 이리 와봐요/ 나는 섬이에요” (‘파도여인숙’ 전문) 안시아의 첫 번째 시집 <수상한 꽃>(2007·랜덤하우스)에서 골랐다. 인용한 시가 시집 전체의 빛깔을 대표한달 수도 없고, 딱히 가장 좋은 시인 것도 아니니, 이런 인용이 시인에게 면구스럽긴 한데, 그래도 이 시여야만 했다. 이것은 마치, 10년 전 ‘밀물여인숙’에서 발송된 한 사내의 편지가 유리병 속에 봉인된 채 쓸려다니다가, ‘파도여인숙’에 도착해 10년 만에 답장을 받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여인이 “파도처럼 이리 와봐요/ 나는 섬이에요”라고 짜릿하게 한마디 할 때, 이 ‘파도 여인’에게서 ‘밀물 사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쓸쓸한 구석에서 만난 이들이 살 비비는 풍경은 이렇게 서로 닮고 만다. 가진 것은 몸뿐,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 그래, 신파 맞다. 맞긴 한데, 그게 또 싫지가 않은 것이다. 뭐랄까, 아늑한 신파라고 할까. 누구에게나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외로운 날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에는 또 이런 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 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부기: 유사품으로 함성호의 ‘벚꽃 핀 술잔’(<너무 아름다운 병>)과 허수경의 ‘도시의 등불’(<혼자 가는 먼 집>)이 있다. 눈물, 겹다.)

(사진/ 원주시 제공)
“창밖을 보다 말고/ 여자는 가슴을 헤친다/ 섬처럼 튀어오른 상처들/ 젖꽃판 위로/ 쓰윽 빈 배가 지나고/ 그 여자,/ 한움큼 알약을 털어넣는다/ 만져봐요 나를 버텨주고 있는 것들,/ 몽롱하게 여자는 말한다/ 네 몸을 빌려/ 한 계절 꽃 피다 갈 수 있을까/ 몸 가득 물을 길어올릴 수 있을까,/ 와르르 세간을 적시는/ 궂은 비가 내리고/ 때 묻은 커튼 뒤/ 백일홍은 몸을 추스른다// 그 여자도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애처로운 등을 한 채로/ 우리가 이곳에 왜 오는지를/ 비가 비를 몰고 다니는 자정 근처/ 섬 사이 섬 사이/ 두엇 갈매기는 날고/ 밀물여인숙/ 조용히 밀물이 들 때마다”(‘밀물여인숙3’ 전문) 꼭 10년 전에 이런 시를 들고 최갑수라는 시인이 나타났다. 당시 25살이었다. 그 나이에 이런 가락이라니. 세 살 아래인 어느 독자에게 이 시의 정서는 징그럽고도 탐나는 것이었다. 여인은 상처를 헤치며 약을 털어넣고, 사내는 그 여인의 몸에 한 시절 의탁해보려고 궁리 중이다. 못난 여인과 못난 사내인 게 분명한데, 자꾸만 이 쓸쓸한 풍경에 마음이 쓸리는 것이다(이 시는 3년 뒤에 시인의 첫 시집 <단 한 번의 사랑>(2000·문학동네)에 실린다). 새삼 이 시를 떠올리게 한 것은 어느 젊은 시인의 시였다. “어디선가 본 적 있지 않아요?/ 창문마다 네모랗게 저당 잡힌 밤은/ 가장 수치스럽고 극적이에요/ 담배 좀 이리 줘요/ 여기는 바다가 너무 가까워요/ 이 정도면 쓸 만하지 않나요?/ 다 이해하는 것처럼 고개 끄덕이지 말아요/ 창밖으로 수평선이 넘치고/ 아 이런, 술잔도 넘쳤나요/ 오래될수록 좋은 건 술밖에 없어요/ 갈 곳도 없고 돈도 없다고/ 유혹하는 것처럼 보여요?/ 부서지기 위해 밀려온 파도처럼/ 이곳까지 떠나온 게 아니던가요/ 여긴 정말 파도 말고는 아무도 없군요/ 그런데 왜 자꾸 아까부터/ 큰 눈을 그리 끔벅대는 거예요/ 파도처럼 이리 와봐요/ 나는 섬이에요” (‘파도여인숙’ 전문) 안시아의 첫 번째 시집 <수상한 꽃>(2007·랜덤하우스)에서 골랐다. 인용한 시가 시집 전체의 빛깔을 대표한달 수도 없고, 딱히 가장 좋은 시인 것도 아니니, 이런 인용이 시인에게 면구스럽긴 한데, 그래도 이 시여야만 했다. 이것은 마치, 10년 전 ‘밀물여인숙’에서 발송된 한 사내의 편지가 유리병 속에 봉인된 채 쓸려다니다가, ‘파도여인숙’에 도착해 10년 만에 답장을 받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여인이 “파도처럼 이리 와봐요/ 나는 섬이에요”라고 짜릿하게 한마디 할 때, 이 ‘파도 여인’에게서 ‘밀물 사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삶의 쓸쓸한 구석에서 만난 이들이 살 비비는 풍경은 이렇게 서로 닮고 만다. 가진 것은 몸뿐,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 그래, 신파 맞다. 맞긴 한데, 그게 또 싫지가 않은 것이다. 뭐랄까, 아늑한 신파라고 할까. 누구에게나 몸에서 비린내가 나는 외로운 날들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에는 또 이런 남녀들의 뽕짝 같은 수작들이 위로가 된다. 나만 아는 그런 여인숙, 어딘가에 꼭 하나만 있어서, 사랑이든 신파든, 한 몇 달 살아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잖은가, 기적이 없는 세계에 신파라도 있어야지. (부기: 유사품으로 함성호의 ‘벚꽃 핀 술잔’(<너무 아름다운 병>)과 허수경의 ‘도시의 등불’(<혼자 가는 먼 집>)이 있다. 눈물, 겹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