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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전원일긔’로 되겄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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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2-06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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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주의의 오만함에 질릴 때면 두고두고 펼쳐볼 이문구의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 태풍클럽 출판 편집자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전라도-경상도 커플인 부모님을 둔 덕에 어렸을 때부터 방언에 관심이 많았다. 명절 때 아버지 쪽 친척들이 모이면 질펀한 전라도말의 향연에 눈을 둥그렇게 떴고, 심심찮게 이모댁에 가면 여자 쪽은 애교 있고 남자 쪽은 고집스러운 대구말에 열심히 귀기울이곤 했다. 대학에서, 사회에서 각 지방의 친구들을 사귈 때도 이런 습관은 퍽 도움이 되었는데, MT 가서 여수 출신의 남학우가 맥주를 아이스박스에 “여부러!” 하고 외칠 때도 그걸 알아들은 이는 나뿐이었고, <웰컴 투 동막골>을 보면서는 속초 바닷가에서 기타를 치며 신청곡을 되묻던 강원도 출신 선배의 “머시기? 퍼햅스 러브래요?”의 악센트가 떠올라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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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문학이 아닌 우리말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즐거울 때는 역시 지역 방언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을 때다. <토지>와 <혼불> <태백산맥>에 실린 경상도말과 전라도말의 꽃심, 심상대 초기작들의 감자바우 강원도 말, 현기영의 제주도말에 어린 서정 등 여러 모범적 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게 인이 박이는 충청도말의 리듬과 표현력을 글자로 들려준 이는 소설가 이문구다. 아직 자민련이 한나라당이 아니었던 시절, 충청도 농촌 토박이들의 이야기를 그린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문학동네 펴냄)를 읽으며 나는 때로는 무릎을 치며, 때로는 배를 쥐고 웃었다. 최양락, 남희석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개그맨 중 약 40%가 충청도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단박에 수긍이 가는 대화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

“저런 것허구 하냥 세금을 내구 사는 내가 안됐다. 내가 안됐어. 저런 이는 아마 메루치꽁댕이두 거제도 메루치꽁댕이라고 허면 임금님 수랏상에 올러가는 진상품이라메 저만치 물라앉겄지.”

“아 작년 여름에 저 비각 모텡이서 해필 물가 쪽으루 세워놓구 년늠이 정신없이 거풋거리는 바람에 차가 못 젼디구 빠꾸해서 풍덩했던 것덜두 건져놓구 보니께 둘 다 거진 한 오십씩이나 됐더라닝께.”

첫 번째는 거제도 출신의 조깅 열심히 하시는 그분이 대통령이 되어 지방을 방문하자 동네 노인이 두루마기를 꿰입고 ‘임금님 오셨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장면을 TV로 본 주인공의 대사고, 두 번째는 동네 골목골목마다 차를 대고 카섹스 행각을 벌이는 도시의 중장년 커플들을 묘사한 지역 주민의 말이다. 소설에는 이처럼 복병처럼 숨은 촌철살인의 풍유들과 전라도 판소리에 능히 필적하고도 남을 풍성한 어휘들이 너울너울 파도친다. 눈으로 읽는 소설이 아니라 머릿속에서 충청도 방언으로 랩을 하며 읽어야 할 소설이다.

이 책에 실린 ‘장천리 소태나무’ ‘장평리 찔레나무’ ‘장이리 개암나무’ 등 작가가 90년대부터 써온 아홉 편의 나무 연작들은 도시로 떠난 자식들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는 노인네들의 처량함을 그린 거짓 서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전원일기> 같은 드라마로 농심(農心)을 달랠 수 있으리라 믿는 도시인의 헛똑똑을 여지없이 비웃어넘기며 하루하루 어찌할 수 없는 갑갑한 속내들을 주거니 받거니 말의 잔치로 위로하는 이들의 풍자와 해학, 분노와 흥겨움의 이야기다. 우수수 내려와 무농약 고추를 밭째 솎아간 웬수 같은 서울 시동생 식구들과 매춘 광고지에 미친 남편을 향해 ‘그래라,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좋다 이거여’를 외치는 진퍼리 부녀회 김학자 회장의 돌아누운 등이나, 기우제 건을 두고 잇속을 차리려는 동네 사람들의 꼴같잖은 짓을 외면하고 까치둥지만 바라보고 있는 전풍식의 타는 속을 뉘가 알아줄까.

소설가 이문구는 갔지만 그가 굽이굽이 펼쳐 보인 충청도말의 진경과 수사학은 한국 문학에 풍성한 잔치를 벌이고도 길이길이 남았다. 나긋나긋한 서울말의 뼛속에 숨은 중앙집권주의와 오만함에 질리는 날에는 두고두고 다시 펼쳐들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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