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프로야구에도 부동산 거품이?

687
등록 : 2007-11-29 00:00 수정 :

크게 작게

‘아파트 한 채값’ 따라가는 연봉 계약, 돈으로 하는 경쟁은 그만하길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프로야구 선수면 연봉이 그럴듯한 아파트 한 채 값은 돼야지.” 이 땅에 본격적인 프로스포츠 시대를 알리는 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프로야구 관계자가 한 말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했을 때만 해도 프로야구는 직업으로서 안정성은 물론 흥행사업으로 정착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공무원·기업체 직원 등으로 일하다 한국야구위원회(KBO)로 옮기는 일반 직원들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프로야구가 1년만 하고 문을 닫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한 이도 있었다.

‘아파트 11채?’ 지난 10월31일 오후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2007 프로야구 정규리그 시상식에서 각 부문에서 활약한 11명의 수상 선수들이 신상우 KBO 총재(앞줄 가운데)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연합 이상학)


KBO사무국이 이랬으니 선수들은 오죽했을까.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전 선수들은 금융단과 실업단으로 크게 나뉜 실업야구에서 현업을 틈틈이 익히며 운동을 했다. 지도자로 나서는 경우를 빼고 대부분의 선수는 은퇴하면 현업으로 돌아와 평생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했다. 시사용어 사전에 ‘구조조정’이란 말이 없던 시절이다. 그러니 선뜻 프로선수를 하겠다고 나설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우수한 선수들이 프로야구 출범 뒤에도 그대로 실업야구에 남아 선수생활을 했다.

“10년에 벌 돈 1년에 챙기도록 하라”

야구팬들의 귀에 익은 몇몇 선수의 그 무렵 직장을 살펴보자. 1983년 신인왕인 OB 베어스 박종훈과 MBC 청룡의 기둥투수 하기룡은 상업은행(우리은행 전신), OB의 왼손 에이스 선우대영과 홈런타자 김우열은 제일은행에서 뛰고 있었다. 이들 외에 기업은행·한일은행·농협 등 금융권 팀에서 활약한 많은 선수가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다. 삼성라이온스의 주력 투수 황규봉, MBC 청룡의 유격수 김재박과 발 빠른 외야수 이해창, 프로야구 원년 한국시리즈 ‘만루홈런의 사나이’ 김유동은 한국화장품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OB의 왼손잡이 강타자 윤동균, MBC의 투타만능 선수 이광은, 삼성의 교타자 장효조는 포항제철 소속이었다. 아마추어 롯데에서 뛰던 최동원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는 바람에 프로 진출이 1년 유보되면서 임호균·유두열 등과 한국전력에서 한솥밥을 먹었다. 직장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만큼이나 어려운 요즘 실정에서 보면 꿈의 일터다.

물론 일부 선수는 프로선수가 돼 자신의 기량을 더욱 발휘하고 실력을 인정받고 싶어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당수 선수는 프로선수로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했다. 그렇다면 이 선수들을 어떻게 프로로 끌어왔을까? KBO 초대 사무총장인 이용일은 다음과 같은 계산법을 내놓았다. 1981년 현재 한국화장품 선수로 뛰고 있는 김봉연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때 김봉연은 상여금을 합쳐 1년에 480만원을 받고 있었다. 군산상고를 졸업하고 1973년 연세대에 입학한 김봉연은 재학 중 군복무를 마치고 실업야구에 데뷔한 초년병이었다. 프로선수는 정년을 보장할 수 없으니 10년에 걸쳐 벌 돈을 1년에 챙길 수 있도록 한다는 계산 아래 계약금 2천만원과 연봉 2400만원을 특급선수의 기준으로 삼았다. 김봉연의 10년 수입과 비슷하게 맞춘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계약한 특급 선수는 미국 프로야구 마이너리그 더블A에서 뛰다 귀국한 OB 투수 박철순 등 몇 명 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특급선수 연봉 2400만원의 가치가 절묘하다. 이 돈이면 요즘 강남의 요지에 있는 아파트보다 훨씬 좋은 값을 쳐준 한강변 한남동의 30평형대 OO아파트를 살 수 있었다.

억대 연봉? 95년엔 한명, 올해는 89명

2007 시즌을 마치고 자유계약선수(Free Agent)로 풀린 김동주, 조인성 등이 최근 원 소속구단과 입단 계약 협상을 벌였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계약금이 무섭게 치솟던 1990년대 중반 여기저기서 ‘억, 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계약금이 아닌 연봉이 억은 기본이고 억 앞에 십 단위가 붙는 시대가 됐다. 심정수는 2005년 FA가 돼 현대에서 삼성으로 옮기며 4년 동안 최고 60억원에 계약을 했다. 계약금이 포함된 액수지만 프로야구에 데뷔할 때 이미 계약금을 받았기 때문에 FA의 계약금은 연봉과 뭉뚱그릴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심정수의 평균 연봉은 15억원이다. FA들의 계약은 성적에 따른 ‘더하기 빼기’ 방식의 이면 조항이 있기는 하지만 연봉의 큰 틀이 바뀔 정도의 조건을 걸지는 않는다.

올 시즌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팀 주력 타자로 활약할 김동주가 FA 시장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았다. 김동주는 심정수의 뒤를 이어 4년 60억원 언저리에서 계약 협상이 펼쳐졌다. 국내 프로야구 최고 수준 선수의 연봉이 드디어 15억원대에 이른 것이다. 이 정도 연봉을 받는 선수는 아직 한 두 명이지만 지난날의 계약금 및 연봉 상승 과정을 보면 심상치 않다. 1995년에는 연봉 1억원 이상을 받은 선수가 해태 선동열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올해 억대 연봉 선수는 89명에 이른다. 선동열은 1985년 국내 프로야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구단 발표액 기준 계약금 1억원을 받았다. 실제로는 계약금 1억3800만원에 연봉 1200만원 등 1억5천만원을 손에 쥐었다. 당시 선동열의 입단 협상에 관여했던 해태 구단의 한 관계자는 “1억원을 벌려면 몇 트럭치 껌을 팔아야 하는데”라며 한숨을 쉬었다. 당시 해태 구단의 모기업은 브라보콘으로 유명한 해태제과였다. 그런데 해태의 후신인 기아 타이거즈는 2005년 신인 한기주를 데려오면서 계약금 10억원을 줬다.

10억원대로 치솟은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은 30여 년 전의 아파트 한 채 값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 강남 압구정동 OO아파트 30평형대의 시가는 13억~15억원 수준이다. 정말 공교롭게도 프로야구 특급선수의 연봉은 그때나 지금이나 딱 그 시세다. 한편으로는 프로야구 선수들의 연봉 상승세가 꺾일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최근 강남권을 중심으로 아파트값 상승세가 수그러 든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올해 1차 지명 신인 8명의 평균 계약금은 1억6천만원 정도다. 물론 4억원이 넘는 계약금을 받은 선수도 있지만 평균치는 20여 년 전의 시세로 돌아갔다. 올 시즌 FA도 김동주, 조인성, 이호준 정도를 빼면 평균 연봉이 수억원대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있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몸값은 이상하게도 앞선 선수의 가격이 기준이 된다. “OOO이 5억원을 받았으니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5억원 이상을 받아야겠다.” 이렇다 할 연봉 산정 기준 없이 선수들이 내세우는 억지스런 주장이었고, 적지 않은 구단이 경쟁하듯 타 구단 선수보다 단돈 1원이라도 더 얹어줬다. 희한하게도 연봉 산정의 기준이 명분 세우기일 경우가 많았다.

적정 규모의 살림해야 살아남을 것

그러곤 한편으로 “이렇게 가다가는 프로야구 망한다”며 엄살을 떨었다. 그런데 이제는 진짜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출범 이후 ‘구단 감소 시대’가 없었다. 일본 프로야구는 1950년 센트럴리그와 퍼시픽리그의 양대 리그 체제로 확대 개편된 뒤, 두 리그 모두 구단의 신설과 소멸, 합병과 감소 등 혼란기를 겪다가 오늘의 6개 구단 시대로 정착했다.

프로야구단을 소유하고 있는 그룹의 계열사들은 형식상 주식회사로 돼 있는 야구단의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명목으로 지원금을 내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형태로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매물로 내놓은 현대 유니콘스는 11월22일 현재 팔리지 않고 있다. 프로야구는 국내에서 시작한 본격적인 첫 번째 프로스포츠다. 적정 규모의 살림을 해야 오랫동안 선수도 살고 관련 업종도 산다. 그렇잖아도 일자리가 없어 허덕이고 있는데 야구 실업자까지 나오면 곤란하다.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