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레21 ·
  • 씨네21 ·
  • 이코노미인사이트 ·
  • 하니누리
표지이야기

분식집에서 미술을 먹다

353
등록 : 2001-04-03 00:00 수정 :

크게 작게

생활공간을 갤러리로 꾸민 ‘아홉’… 수도꼭지·화장실 물통·테이블보·메뉴판에 작품이 스며 있다네

사진/‘종분 엄마’로 불리는 주인 경희수(왼쪽에서 두번째)씨와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탁자에 그려진 등고선 그림도 전시 작품이다. 박선희씨의 <다리 밑 유토피아>.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 허름한 철문을 열고 분식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관람객은 당황하기 십상이다. 입구에는 분명 전시회가 열린다고 써 있었지만 전시장에는 전시회에 대한 일반적 상식에 들어맞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분식집에서 미술 전시회가 열린다는 것 자체도 희한한 일인데, 도대체 작품은커녕 작가와 작품 제목을 써서 붙이는 작은 푯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잘못 들어왔나 싶어 발길을 돌리기에는 이미 민망해진 뒤다.

김귀정이 단골이었다는 그 ‘종로분식’


사진/종로분식 입구에 걸려 전시회가 열리고 있음을 알려주는 김시하씨 작품 <바로 곁>.
하지만, 다시 눈을 부릅뜨고 구석구석을 살펴보기 시작하면 작품들은 비로소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테이블보에, 벽에 걸린 액자들 사이에, 외상장부처럼 끈이 달려 붙어 있는 노트 속에 작품들은 숨어 있다. 미처 눈여겨보지 못하고 지나친 입구쪽 벽 위의 푸른 페인트칠도 작품이고, 구석에 뜬금없이 붙어 있는 수도꼭지와 화장실 물통도 모두 작품이다. 그리고 바로 그 즈음 주인 아주머니의 작품설명이 시작된다. “이거, 생활미술이래. 그래서 작품 티가 잘 안 나니까 잘 들여다봐야 해. 어제는 헬로 아저씨(외국인)도 와서는 ‘오, 뷰티’ 어쩌고 하다가 가데?”

종로분식 프로젝트. 워낙 이색적인 전시가 많은 미술계에서도 유난히 이색적인 전시가 지난 3월31일까지 열렸다. 전시장은 화랑이 아닌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앞 골목에 있는 작은 분식집 ‘종로분식’이었고, 전시를 연 이들은 올해 초 결성된 젊은 미술가들의 모임 ‘아홉’이었다. ‘아홉’은 미술에서 소외된 빈 공간을 찾아 미술적인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표방해 모인 그룹으로, 이번 전시가 이들의 첫 번째 작업성과였다.

그룹 아홉이 종로분식을 전시장으로 고른 것은 멤버 가운데 성대 출신이 여럿 있어서 이곳에서 종종 전시 논의를 벌였고,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전시를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었다. 재학 시절부터 단골이었던 하영호(35)씨가 주인 경희수(60)씨에게 전시를 제안했고, 주인 경씨가 흔쾌히 승락한 것이 이 이색 전시회가 열리게 된 전말이다. 그러나 이 전시회에는 또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종로분식은 규모나 시설로 따진다면 성대 앞 수많은 식당 가운데에서도 보잘것없는 허름한 분식집이자 술집일 뿐이지만, 다른 가게와는 분명히 ‘다른’ 곳이기 때문이었다.

사진/전민정씨의 <다 채우지 못한 벽들>. 주인 경씨가 걸어놓은 그림들 사이에 박씨의 작품을 집어넣었다.
성대생들이 줄여서 ‘종분’이라고 부르는 종로분식은 사회과학 서점 ‘논장’과 함께 성대생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성대 앞 명소다. 데모가 끊이지 않았던 시절, 학생들은 이 종로분식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마시면서 울분을 풀었고, ‘가투’를 마치고 나면 이곳에 모여 ‘생사확인’을 했다. 돈이 없으면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 배고프면 술 대신 밥달라고 해서 요기를 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난 91년 경찰의 ‘토끼몰이’식 진압에 목숨을 잃은 김귀정씨도 이곳의 단골이었다. 김씨가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경씨는 김밥 100인분을 직접 만들어 김씨의 영안실로 들고가 학생들에게 먹였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성대생들은 경씨를 ‘엄마’라고 부른다. 이런 점에서 종로분식은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고, 2000년대에 존재하면서도 ‘80년대’라는 시기적 의미를 담고 있는 장소이다.

또 하나의 작품, 오돼떡

사진/황정미씨의 <있다.1>. 전기 콘센트가 있었던 벽의 구멍 속에 동화적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자세히 보면 전깃줄에 목을 매 자살한 쥐의 모습이 들어있다(왼쪽). 하영호씨의 <토끼몰이>. 고 김귀정씨의 친구였던 하씨의 토끼몰이 당하던 처지에서 토
작가들이 고심한 부분은 과연 이곳을 어떻게 꾸밀 것이냐의 문제였다.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꾸미는 것, 아니면 공간 속에 차분하게 녹아드는 눈에 띄지 않는 변화를 주자는 두 가지를 놓고 고민하다가 작가들은 후자를 골랐다. 전시를 기획한 전민정(28)씨는 프로젝트의 성격을 80년대 운동권 문화적 분위기와 90년대의 하위문화적인 분위기를 결합시키는 것으로 잡았다고 설명했다. “언뜻 보면 촌스러워 보일지 몰라도, 종로분식은 주인 아주머니의 삶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손수 짜서 널어놓은 방석들이며 학생들과 찍은 사진과 신문기사를 스크랩해 벽에 건 액자들, 그런 모습과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상업주의의 얄팍함을 넘어서는 인간적 향기와 대안을 느꼈다. 그래서 이 집의 고유한 느낌을 그대로 살리자고 결론을 내렸다.”

작가들은 각자 고른 장소를 해석하고, 거기에 상상력을 발휘해 미술을 덧씌웠다. 김시하씨는 분식집으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에 앵무새 그림을 달았고, 박선희씨는 식탁보에 지도의 등고선 그림을 그렸다. 손민형씨는 작품을 아예 만화로 만들어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음식을 기다리며 읽을 수 있게 했다. 전민정씨는 주인 경씨가 벽에 걸어놓은 액자들 사이에 자신의 작품을 살그머니 끼워넣었다. 그래서 작품들은 기획대로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전시장인 줄 알고서 찾아온 관객도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고, 모르고 찾아온 학생들은 그냥 식사만 하다가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생활미술의 어감이 어려운 정통미술에 비해 막연히 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생활미술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갤러리라는 익숙한 공간이 아니고 이미 특징지워진 이미지와 고정된 제한요인이 있는 생활공간 속에서 이뤄지기 더 힘든 작업이 바로 생활미술이다. 그래서 자칫 생활과 미술 어떤 것도 아닌 붕 떠버린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작가들은 비록 그런 효과까지 의도했다고 하지만 모든 어려움을 온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었다. 참여작가 김민아(24)씨는 “기획대로 작업에 들어갔지만 실제 계획대로 작업하기가 어려워 일반 전시장에서 하는 전시보다 훨씬 힘들었다”고 작업소감을 밝혔다. 하지만 아직은 젊기 때문에 도전한 주제가 생활미술이고, 이번 전시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시행착오는 이들이 건진 가장 큰 수확이다.

전시회는 공식적으로는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사실상 종로분식이 문닫을 때까지 계속된다. 작품들이 대부분 종로분식의 인테리어로 그대로 남기 때문이다. 요기도 하고 전시도 보려는 방문객은 여기서만 맛볼 수 있는 또다른 ‘작품’ 하나를 감상하는 것도 작품을 보는 맛을 더해줄 것이다. 바로 주인 경씨의 작품 ‘오돼떡’이다. 오징어볶음과 제육볶음, 떡볶이를 합친 이 집의 간판 메뉴다. 매콤한 오돼떡을 먹으며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미술 감상은 시작된다. 이 역시 작가들이 처음부터 바랐던 전시의 한 부분이니까.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좋은 언론을 향한 동행,
한겨레를 후원해 주세요
한겨레는 독자의 신뢰를 바탕으로 취재하고 보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