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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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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22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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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미 시인의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 신형철 문학평론가

생각하지 말아야 할 사람은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듣지 말아야 할 음악은 듣지 말아야 하고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은 먹지 말아야 한다. 요즘 같은 날씨에 자칫 방심했다간 이유 없는 비애가 몰려와서 하루를 망치게 된다. 아니다. ‘이유 없는’이라는 말은 틀렸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비애는 없다. 너무 많은 이유가 있거나 인정하기 싫은 이유가 있을 뿐. 아니다. 히포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람은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데, 그중 몸에 검은 담즙이 많은 사람들은 더러 이유 없는 비애에 시달리기도 한다니까. ‘검은 담즙’을 뜻하는 ‘멜랑콜리’가 오늘날 우울증의 명칭이 된 것은 그래서다.


토성의 기질을 타고난 사람에게도 멜랑콜리는 평생의 벗이다. 수전 손태그에 의하면 비평가 베냐민이 그런 유형이었던 것 같다. 친구 숄렘은 ‘심오한 슬픔’이 그의 특징이라 했고, 프랑스인들은 그를 ‘슬픈 사람’이라고 불렀다니까. 그런 유형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수전 손태그, <우울한 열정>) 그러니 베냐민의 자살은 어쩌면 파시즘과 토성의 합작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담즙이나 토성 따위와 무관한 사람인들 그 칼로부터 안전할 수야 있겠는가. 어떤 비애는 칼이 되어 나를 겨눈다. 이 비애를 어찌해야 하나.

“가슴속에서 검은 담즙이 분비되는 때가 있다 이때 몸속에는 꼬불꼬불 가늘고 긴 여러 갈래의 물길이 생겨난다 나뭇잎의 잎맥 같은 그 길들이 모여 검은 내, 흑하(黑河)를 이루었다// 흑하의 물줄기는 벼랑에서 모여 폭포가 되어 가슴 깊은 곳을 가르며 옥양목 위에 떨어지는 먹물처럼 낙하한다// 폭포는 검은 담즙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다 생의 단 한 순간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비애는 그을린 태양 아래 거칠고 긴 숨을 내쉬며 가만히 누워 있다”

조용미의 시 ‘검은 담즙’의 전반부다. 후반부는 이렇다.

“쓸갯물이 모여 생을 가르는 검이 되기도 하다니 검은 폭포 아래에서 모든 것들은 부수어져 거품이 되어 버린다 거품이 되어 날아가는 것들의 헛된 아름다움이 너를 구원할 수 있을까// 비애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니 환(幻)이 끝나고 멸(滅)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삶은 다시 시작되는 것을 검은 담즙이 모여 떨어지는 흑하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지상에서 가장 헛된 것이라 부르겠다// 지상에서 가장 헛된, 그 아름다움의 이름은 절멸(絶滅)이다”

최근에 출간된 네 번째 시집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문학과지성사·2007)에서 골랐다. 얼마나 깊은 비애가 이런 이미지를 만드는가. 몸속에서 분비된 검은 담즙이 강을 이루고 폭포가 되어 마침내 가슴을 가른다. 그때 시인은 저 자신을 타이르듯 말한다. “너의 죄는 비애를 길들이려 한 것이다.” 비애를 길들이려 해서는 안 된다. 아니 비애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폭포가 부서져 거품이 되어 날아가듯, 비애는 스스로 절멸한다. 바로 그 순간, 환이 멸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이를테면 삶 속에 시가 흘러드는 순간일 것이다. 그래서 그 절멸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과 더불어 “삶은 다시 시작”된다.

50년 전에 김수영은 이렇게 썼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비’에서) ‘검은 담즙’의 시인이 폭포 앞에서 비애의 낙하와 절멸을 생각할 때, ‘비’의 시인은 내리는 비 앞에서 “움직이는 비애”에 관해 명상했다. 이 시들이 품고 있는 삶은 비애에 매몰되는 삶도 비애와 싸우는 삶도 아니다. 비애와 더불어 사는 삶이다. 비애와 더불어 산다니, 그것은 도대체 어떤 경지일까. 그 자신 누구보다 담즙과 토성의 사람이었던 베냐민은 이런 문장을 남겼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일방통행로>) 비애와 더불어 사는 삶이 어쩌면 이런 것일까. 그래서 이렇게 옮겨 적는다. 삶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삶을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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