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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요즘엔 응원단도 전세기 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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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1-1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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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타고 배타고 완행 비행기타고… 선수들이 경기장 가기도 전에 지치던 시절을 아십니까

▣ 신명철 <스포츠 2.0> 편집위원

“차장급 이상 기자분들은 손 들어주시겠습니까.” ‘88서울올림픽’ 다음 대회인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1992년 7월25일~8월9일)에 출전하는 국가대표 선수단 본진과 취재진을 태운 대한항공 전세기가 대회 개막 일주일여를 앞두고 김포국제공항에서 이륙했다. 비행기가 고도를 잡자 사무장이 기자들 좌석 쪽으로 오더니 수학여행 길에 나선 학생들의 반별 인원을 확인하듯이 큰 소리로 물었다. 신문사와 방송사의 차장급 이상 기자들이 한두 명씩 손을 들었다.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 같은 국제종합경기대회의 경우 방송사는 취재기자 외에 캐스터와 해설자 그리고 기술요원 등 대규모 방송단을 꾸린다. 그러나 신문사에서는 올림픽이어도 많으면 5~6명, 적으면 1~2명의 취재진을 보낸다. 현장기자보다는 내근기자들이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격세지감’ 국가대표팀조차 비행기표를 구하지 못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젠 응원단도 전세기편으로 원정 응원에 나선다. 지난 2004년 3월 올림픽 축구 예선전 응원을 위해 이란으로 떠나는 붉은 악마 응원단이 인천국제공항에서 출국 심사를 받고 있다.(사진/연합 이진욱)


그래서 차장급 이상 기자라고 해봐야 그리 많지 않다. 7~8명의 기자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미적미적 사무장의 뒤를 따랐다. 사무장이 안내한 곳은 비행기 2층에 마련된 일등석(First Class)이었다. 어지간한 승객은 가보기도 힘든 좌석이다. 선수단 임원을 중심으로 일등석 좌석을 배정했으나 몇 석이 비었던 것이다. 그래서 몇몇 차장급 기자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올림픽 대표팀을 위한 전세기를 띄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영국 신혼부부가 표 양보한 사연

이제는 국가대표 선수들이 전세기를 타고 올림픽이나 아시아경기대회에 가는 게 일상처럼 됐지만, 나라의 경제력이 미약했던 30~40년 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1948년 제14회 런던올림픽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고 나선 뜻깊은 대회다. 이때 축구·역도 등 국가대표 선수들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 그곳에서 배를 타고 요코하마로 간 뒤, 다시 홍콩까지 여객선을 타고 갔다.

홍콩에서 다시 런던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대회 개막일이 7월29일인데 서울 출발일이 6월21일인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국제종합경기대회는 아니지만 1954년 6월 열린 제5회 스위스 월드컵에 출전한 축구 국가대표 선수단의 여정 역시 힘들기만 했다. 6월10일 미군 비행기 편으로 서울을 떠나 일본에 도착한 선수단은 유럽행 항공권을 구하러 항공사에 갔으나, 예약을 하지 않아 출발 일정이 불확실하다는 말만 들었다. 일본축구협회의 협조로 운동장을 빌려 훈련을 하며 비행편을 기다렸다. 그러나 6월16일 개막일은커녕 헝가리와 첫 경기를 하는 6월17일에도 도착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훈련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그런 가운데 6월13일 방콕에서 떠나는 영국행 비행기가 있다는 연락이 왔다. 문제는 방콕까지 가는 데 필요한 항공편이었다.

6월11일 9개의 좌석이 있고 6월12일에는 11개의 좌석이 있다는 것이었다.후보 선수 8명이 먼저 출발하기로 하고 주전 선수 12명은 이튿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선수단은 단장을 포함해 22명이었다. 나머지 두 자리는 일본을 여행 중인 영국인 신혼부부가 “월드컵에 항공권이 없어서 출전하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자신들의 일정을 늦춰가며 양보해준 덕분에 해결할 수 있었다.

선수단이 6월13일 방콕을 떠나 스위스에 도착한 것은 현지 시간 6월16일 밤 10시께였다.중간 기착지인 인도 콜카타에서 프로펠러를 고치느라 지체했기 때문이다. 긴 여행에 지친 선수들은 파김치가 돼 곧바로 잠에 떨어졌고 이튿날 오후 3시 취리히 하르트투름 구장에서 푸스카스가 이끄는 헝가리와 2조 조별리그 1차전을 가졌다. 결과는 축구팬들이 알다시피 0-9 대패였다.

서울~모스크바 직항로 없어 돌고 돌아

대한축구협회는 오는 11월17일 2008년 베이징올림픽 남자축구 최종예선 B조 5차전 우즈베키스탄 원정경기를 치르는 올림픽 대표팀 응원단을 위해 전세기를 띄우기로 했다고 한다. 돌아오는 전세기에는 선수단이 탑승할 예정이다.

내년에 올림픽을 치르는 베이징은 1990년에는 제11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1974년 ‘죽의 장막’을 걷고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를 통해 국제종합경기대회에 데뷔한 중국은 1949년 새 정권 수립 이후 처음으로 나선 19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미국, 루마니아, 서독에 이어 4위에 오르며 자신감을 얻은 뒤 1990년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

이때도 한국 선수단 본진은 전세기를 타고 베이징에 갔다. 서해 공해로 빠져나간 전세기는 동쪽으로 북녘 땅을 바라보며 북진한 뒤 단둥 근처에서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베이징으로 직항했다. 비록 공해 상공이었지만 장산곶과 해주를 소개할 수 있고 베이징으로 직항한다는 사실에 기장의 안내 방송 목소리는 흥분돼 있었다. 1986년 9월 서울에서 벌어진 제10회 아시아아경기대회에 중국은 미수교 상태였지만 대규모 선수단을 보내 새로운 한-중 관계의 출발을 알렸다. 4년 뒤엔 역시 미수교 상태에서 대한민국의 국적기가 많은 선수들과 취재기자들을 태우고 서울~베이징 직항로를 날았다. 그리고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졌다. 이듬해 중국에서 열린 주요 국제대회와 행사 취재에 나선 한국 기자들은 홍콩을 경유해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처음 그 길을 튼 이들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고 감격해했다.

중간 기착지 없이 14시간 이상을 난 전세기는 스페인 남부 지중해 상공을 스치듯 날아 바르셀로나국제공항에 도착했다. 국제대회에 나선 선수들이 컨디션을 조절하는 데 부딪치는 첫 번째 어려움은 장거리 비행에 따른 피로다. 특히 빠듯한 경비를 쪼개 써야 하는 비인기 종목의 경우 ‘완행 비행기’를 타면 중간 기착지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만만찮다. 1988년 12월 옛 소련의 그루지야공화국 트빌리시에서 열린 세계대학생유도선수권대회 대표선수들은 서울을 출발해 알래스카의 앵커리지를 경유해 영국 히스로 공항에 도착했다. 히스로 공항에서 개트윅 공항으로 이동한 선수단은 공항 내 시설물에 익숙하지 않아 엉뚱한 곳에서 탑승 절차를 밟다 힘만 뺐다. 어렵사리 모스크바행 비행기에 오른 선수단은 모스크바 국제공항에 도착한 뒤 모스크바 시내에서 1박하고 이튿날 아침 모스크바 국내선 공항에서 트빌리시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대회 하루 전날 오후에 경기 장소에 도착한 선수들의 컨디션은 엉망이었다. 체력이 약한 일부 여자 선수는 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서울~모스크바 직항로가 뚫려 있는 요즘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전세기에서 ‘승리의 떡’ 먹는 기분이란

바르셀로나 국제공항에서 빠른 입국 절차를 마친 선수들은 공항 옆에 마련된 선수 등록센터에서 대회 기간 패용할 선수 신분증을 발급받고 곧바로 대회조직위원회에서 마련한 셔틀버스를 타고 선수촌으로 향했다. 안락한 비행과 맛있는 기내식 그리고 승무원들의 한국말 격려 기내 방송까지 선수들은 무엇 하나 불편할 게 없었다. 선수촌으로 가는 셔틀버스에 탄 선수들의 얼굴에서는 피로한 기색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한국은 대회 첫날 사격 여자 공기소총에서 여갑순이 금메달을 딴 것을 첫머리로 대회 마지막 날 황영조가 남자 마라톤에서 감격의 금메달을 따기까지 대회 기간 내내 선전했다. 한국은 바르셀로나 대회에서 금메달 12개, 은메달 5개, 동메달 12개을 땄다. 개최국의 이점을 안은 서울올림픽(금 12, 은 10, 동 11)에 버금가는 좋은 성적이었다.

대회가 끝나고 메달리스트들을 태운 귀국 선수단 본진이 다시 전세기에 올랐다. 비행기 안은 축제 분위기였다. 안방에서 거둔 종합 4위에 대한 국제 스포츠계의 비판적인 시각을 단숨에 날려버린 종합 7위의 성적을 거뒀기 때문이다. 승무원들은 서울에서 가져온 샴페인을 터뜨렸다. 흥겨운 마당에 빠져서는 안 될 떡도 있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오는 동안 냉장고 안에 있던 떡이 돌덩이처럼 얼어버려 먹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언 떡이면 어떠랴. 현지 시간 11월18일 새벽 귀국편 전세기에 오를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베이징올림픽 본선 출전을 사실상 확정하는 승리의 떡을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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