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의 시들, 절망적인 세계 앞에서 문학은 사력을 다해 절망할 뿐
▣ 신형철 문학평론가
아마도 자이툰 부대는 내년에나 돌아올 모양이다. 대통령은 다시 한-미 공조의 불가피함을 호소했고, 한 여론조사는 파병 연장에 찬성하는 국민이 더 많다는 소식을 전했다. 결국은 이렇게 가는 것인가. 반대의 목소리는 아름다우나 무력해 보이고, 답답한 현실은 끔찍하지만 완강해 보인다. 이러할 때 문학의 자리는 어디에 있는가. 2003년 이래 반전(反戰)을 외친 문인들이 적지 않았으나 대개는 일회적인 것에 그쳤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허수경이 있다.
[%%IMAGE4%%]
그녀가 고고학을 공부하러 독일로 떠난 것이 14년 전이다. 2년 전 이맘때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2005)을 출간했다. 스스로 ‘반(反)전쟁시’라 명명한 시편들을 묶으면서 그녀는 이런 사연을 첨부했다.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시인의 안간힘을 이해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실상 저 시집이 감동적이었던 까닭도 희망 때문이 아니었다. 희망을 말하는 시에 마음을 내어준 적이 별로 없다. 크게 부르짖는 희망은 미학적 파탄을 가져오기 쉽고, 낮게 읊조리는 희망에는 어딘가 타협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문학이 희망을 줄 수는 없다. 문학은 절망적인 세계 앞에서 사력을 다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다. 허수경의 시가 이미 그러했다. 절대적으로 부도덕한 세계 앞에서 절대적으로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웠다. 이후에도 그녀의 작업은 꾸준하다. 계간 <문학동네>(2007 여름)에 발표된 최근작 두 편이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혹은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나의 도시들’에서) “울지 마 울지 마 결혼반지 잃어버린 육십 넘은 동백꽃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내일 헐려나갈 천년 넘은 집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십수 년째 거짓말만 하고 있는 시인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이런 것도 눈 감는 거라고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건너가는 철새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포유류와 조류의 갈림길에서 어류와 갑각류의 갈림길에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틀린 결정만 해온 존재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여기는 이국의 수도’에서) 이 두 편은 올해에 발표된 가장 아름다운 시가 될 것이다. 허수경은 타락한 제정분리 시대의 외로운 샤먼 같다. 영감에 넘치는 수사(修辭)와 몽환적이고 주술적인 리듬은 예나 지금이나 독보적이다. ‘이국의 수도’에서 그녀는 세계의 모든 도시들을 ‘나의 도시들’로 껴안는다. 그녀의 좋은 시에서 모든 술어들은 ‘운다’의 슬하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운다’라고 쓰지 않고 그냥 운다. 눈물이 고이듯 의미가 고이고, 눈물이 흐르듯 가락이 흐른다. 그녀의 시는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이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목청 높여 분노하고 거창한 대안을 도모하는 시들은 이 울음 앞에서 무력하다. 모국어의 가장 섬세한 유역에서 흐르는 이 눈물이 세계적인 보편성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는 일은 감동적이다. 누군가의 수사를 빌려 말하건대, 만약 허수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녀를 발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 덕분에 다시 되새긴다.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
그녀가 고고학을 공부하러 독일로 떠난 것이 14년 전이다. 2년 전 이맘때 네 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문학과지성사·2005)을 출간했다. 스스로 ‘반(反)전쟁시’라 명명한 시편들을 묶으면서 그녀는 이런 사연을 첨부했다. “이런 비관적인 세계 전망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나지막한 희망, 그 희망을 그대에게 보낸다.” 시인의 안간힘을 이해하지만 우리는 희망을 믿지 않는다. 실상 저 시집이 감동적이었던 까닭도 희망 때문이 아니었다. 희망을 말하는 시에 마음을 내어준 적이 별로 없다. 크게 부르짖는 희망은 미학적 파탄을 가져오기 쉽고, 낮게 읊조리는 희망에는 어딘가 타협의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문학이 희망을 줄 수는 없다. 문학은 절망적인 세계 앞에서 사력을 다해 절망할 수 있을 뿐이다. 허수경의 시가 이미 그러했다. 절대적으로 부도덕한 세계 앞에서 절대적으로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웠다. 이후에도 그녀의 작업은 꾸준하다. 계간 <문학동네>(2007 여름)에 발표된 최근작 두 편이다.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서울 사천 함양 뉴올리언스 사이공 혹은 파리 베를린/ 나의 도시들 물에 잠기고 우울한 가수들 시엔엔 거꾸로 돌리며 돌아와, 내 군대여, 물에 잠긴 내 도시 구해달라고 울고/ …/ 나의 도시 나의 도시 당신도 젖고 매장당한 문장들 들고 있던 사랑의 나날도 젖고/ 학살이 이루어지던 마당도 폭탄에 소스라치던 몸을 쟁이고 있던 옛 통조림공장 병원도 젖고/ 죄 없이 병에 걸린 아이들도 잠기고/ 정치여, 정치여,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말하던 사람들 산으로 올라가다 잠기고”(‘나의 도시들’에서) “울지 마 울지 마 결혼반지 잃어버린 육십 넘은 동백꽃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내일 헐려나갈 천년 넘은 집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십수 년째 거짓말만 하고 있는 시인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이런 것도 눈 감는 거라고 이 대륙에서 저 대륙으로 건너가는 철새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 포유류와 조류의 갈림길에서 어류와 갑각류의 갈림길에서 중세와 르네상스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틀린 결정만 해온 존재처럼 울지 마 울지 마 울지 마”(‘여기는 이국의 수도’에서) 이 두 편은 올해에 발표된 가장 아름다운 시가 될 것이다. 허수경은 타락한 제정분리 시대의 외로운 샤먼 같다. 영감에 넘치는 수사(修辭)와 몽환적이고 주술적인 리듬은 예나 지금이나 독보적이다. ‘이국의 수도’에서 그녀는 세계의 모든 도시들을 ‘나의 도시들’로 껴안는다. 그녀의 좋은 시에서 모든 술어들은 ‘운다’의 슬하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운다’라고 쓰지 않고 그냥 운다. 눈물이 고이듯 의미가 고이고, 눈물이 흐르듯 가락이 흐른다. 그녀의 시는 모국어가 흘리는 눈물이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목청 높여 분노하고 거창한 대안을 도모하는 시들은 이 울음 앞에서 무력하다. 모국어의 가장 섬세한 유역에서 흐르는 이 눈물이 세계적인 보편성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는 일은 감동적이다. 누군가의 수사를 빌려 말하건대, 만약 허수경이 없었다면 우리는 그녀를 발명해야 했을 것이다. 그녀 덕분에 다시 되새긴다. 문학은 절망의 형식이다. 우리의 나약하고 어설픈 절망을 위해 문학은 있다. 그리고 희망은 그 한없는 절망의 끝에나 겨우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