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5경기 출장·무교체 연속 출전 153경기로 신기록 행진하는 골키퍼 김병지 선수
▣ 송호진 한겨레 스포츠부 기자dmzsong@hani.co.kr
창원공단 금성산전에서 용접공으로 일하며 직장 축구팀 골키퍼를 봤다. 대학들은 축구가 하고 싶어 마산공고에서 부산 ‘소년의 집’으로 전학했던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의 처지를 냉소적으로 대하는 건, 그답지 않은 것이었다. 그는 “처음 골키퍼 장갑이 빨강색 고무가 손바닥에 있는 목장갑이었다. 어린 시절 내 유일한 방패였던 그 목장갑이 내 가슴속에선 황금장갑으로 남아 있다”고 추억할 줄 아는 남자였다.
아내 생일날 ‘한 골’ 넣은 사연 상무팀으로 옮겨 연습경기를 하다 차범근 감독 눈에 띄어 울산 현대에 뒤늦게 들어갔지만, 국가대표까지 치고 올라가는 ‘깡다구’가 있었다. 그는 “프로 진출, 국가대표 발탁, 국가대표 주전. 이렇게 목표를 높여왔다. 어려운 시절도 이겨냈는데 패배자로 사는 건 어리석은 거란 마음으로 살았다”고 했다. 1990년대 축구선수의 염색 머리도 흔치 않았는데, 거기에 뒷머리에 ‘꽁지’를 하나 더 붙이는 파격도 즐길 줄 알았다. 아내는 경기 당일(1998년 10월24일) 아침 “내 생일 선물로 골 하나 넣어달라”고 했다. 남편이 골키퍼였으니 그건 분명 아내의 농담이었는데, 이 ‘순정파’ 남편이란…. 그는 K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팀이 탈락 위기에 있던 종료 직전 상대 골문으로 뛰어가 극적인 헤딩 결승골(2-1승)을 넣으며 아내의 생일을 짜릿하게 축하해준 로맨티스트였다. 그러곤 “내 말에 귀기울여준 당신.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감격과 기쁨! 그건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며 성실하게 사는 당신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란 아내의 고백을 받아든 행복한 사내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이운재에게 밀려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자기가 서야 할 곳에서 승부차기를 막아낸 이운재에게 달려가 펄쩍펄쩍 뛰며 같이 기뻐해주는 것. 독일과의 4강전에서 진 뒤 이운재에게 “수고했다. 잘 싸웠다”고 격려할 수 있는 것.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를 다시 대표팀에 발탁하라는 여론이 일었지만, 23명 명단에 그는 없었다. 이운재가, 그리고 김용대와 김영광 같은 어린 후배가 어딘가 다쳐야 월드컵에 갈 수 있는 예비선수. 그곳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아내는 울었다. 그도 “월드컵 출전은 열망이자 열정이다. 나도 사람이기에 가능성을 반반으로 보고 기대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시 후배들에게 향했다. 그는 “그라운드에 열정을 쏟아붓고 오거라. 나도 열심히 너희를 응원하겠다”며 아쉬운 마음을 꽁꽁 숨겼다. 경기 전 링거와 진통제 맞고도 출전 2007년 K리그. 김병지(FC서울)는 ‘가을축제’에서 제외됐다. 6강 플레이오프를 손에 쥔 듯했던 FC서울은 K리그 최종전에서 대구에 0-1로 졌다. 비기기만 해도 6강행이 가능했으니, 전반에 먹은 골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골을 허용했을 때 위기감을 느꼈다”고 떠올렸다. 그의 불길한 예감대로 같은 시각 대전 시티즌이 수원 삼성을 꺾으면서 6강 티켓이 대전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시즌이 끝났다. 그러나 이번 시즌 그가 남긴 흔적. 정말 간단치 않은 것들이다. 역대 최다 출장 465경기(총 실점이 463점이니, 그 힘들다는 통산 0점대 실점률이다), 통산 최다 무실점 165경기, 한 시즌 최다 무실점 21경기, 무교체 연속 출전 153경기 신기록. 특히 그는 무교체 연속 출전에 주목했다. 2004년 4월3일부터 3년6개월 동안 그 흔한 감기로 눕는 것조차 없이, 팀 내 골키퍼와 싸움에서 밀리는 것 없이 와야 가능한 일이다. 그 여정만도 경기 시간 1만3860분, 231시간이다. 그래서 프로축구 최고령(38살), ‘노장’이란 말은 그 자신도 깜박깜박 잊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인터텟 공간에서 “후배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자리 좀 물려주고 길을 터주라”고 ‘악플’을 쏟아낸다. 후배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무교체라는 게 시간이 흐른다고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니지 않느냐. 경기 2~3시간 전까지 링거를 맞기도 했고, 진통제를 맞고 나가는 등 고비도 여러 차례 많았지만, 자기 관리가 있어야 되는 일이다. 팀에서 내가 없어진다고 그것이 후배들의 자리가 바로 되는 게 아니다. 팀이 원하는 만큼 채우지 못하면 팀은 다른 선수를 데려올 것이다. 그래서 난 후배들에게 얘기한다. 경쟁은 내가 아닌 축구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한다고. ” 이영진 FC서울 코치는 “그는 진짜 프로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나이가 많다고 운동을 쉬지 않는다.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다. 운동장에서 이기는 사람이 출전하는 거다. 김병지 덕에 올 시즌 14개 팀 중 우리가 최소 실점이었다. 우리 팀에 병지보다 나은 선수가 없으니 그가 나가는 것뿐이다.” 박영수 전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현 GK연구소·트레이닝센터 소장)는 “대단한 기록”이라고 했다. “골키퍼도 90분간 4km를 뛰는 운동량을 보인다. 거기에 골에 대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다. 한 번의 실수에서 오는 중압감이 크다. 그걸 이겨야 하고, 감독의 믿음도 있어야 하고, 골키퍼 앞에 있는 수비수들의 신뢰도 있어야 자리를 지킨다. 그게 쉬운 일인가?” 그에겐 아들 3명이 있다. 김태백(8), 김산(6), 그리고 8월에 태어난 늦둥이 김태산. 첫째는 경기 구리 부양초등학교 2학년 축구선수다. 둘째 김산도 한국방송의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슛돌이’ 멤버로 활동했고, 축구선수를 꿈꾼다. 아이들은 공만 50여 개 있는 집에서 액자를 깨기 일쑤고, 아빠가 축구를 못하게 하는 벌칙을 가장 무서워한다. “천둥보다 강하고 불보다 센 아빠” 둘째 산은 “아빠 슛은 선더(천둥)보다 강하고, 파이어(불)보다 세다”고 말할 정도로 아빠를 자랑스러워한다. 김병지는 첫째를 조만간 골키퍼로 전환시켜 대를 이어가게 할 생각이다. 그러곤 훗날 지금 아빠가 매 경기 새롭게 바꿔가는 신기록을 깨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아들이 너무나도 버거워할 500경기 출장을 향해 또 가고 있다. 그는 “‘처음처럼, 그리고 지금처럼’이란 말을 새기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무교체 출장 타이 기록을 세우던 지난 10월8일,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미니홈피에 글을 남겼다. “내 자신을 격려하고 이렇다 할 칭찬 한 번 하지 못했으나, 오늘만큼은 나를 위해 내가 축배의 잔을 올린다. ‘김병지 수고했다.’ 내가 세워놓은 제일 큰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날 지금보다 더 큰 외침으로 다시 한 번 나를 격려하며 감싸안으리라. 넌 진정 축구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마지막 그의 글. 혹시 “저 노장, 곧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하는 후배들이 섬뜩한 마음으로 귀기울여야 할 말이다. “(앞으로) 어떤 숫자가 나의 가슴에 그려질지 난 모른다…. 그래서 난 달린다.”

페널티킥을 막아내기 위해 온몸을 내던진 뒤에도 그의 눈은 여전히 공을 향해 있다. 그래서 프로축구 최고령(38살), 김병지는 ‘노장’이란 말을 깜빡깜빡 잊곤 한단다. (사진/ 연합 배재만)
아내 생일날 ‘한 골’ 넣은 사연 상무팀으로 옮겨 연습경기를 하다 차범근 감독 눈에 띄어 울산 현대에 뒤늦게 들어갔지만, 국가대표까지 치고 올라가는 ‘깡다구’가 있었다. 그는 “프로 진출, 국가대표 발탁, 국가대표 주전. 이렇게 목표를 높여왔다. 어려운 시절도 이겨냈는데 패배자로 사는 건 어리석은 거란 마음으로 살았다”고 했다. 1990년대 축구선수의 염색 머리도 흔치 않았는데, 거기에 뒷머리에 ‘꽁지’를 하나 더 붙이는 파격도 즐길 줄 알았다. 아내는 경기 당일(1998년 10월24일) 아침 “내 생일 선물로 골 하나 넣어달라”고 했다. 남편이 골키퍼였으니 그건 분명 아내의 농담이었는데, 이 ‘순정파’ 남편이란…. 그는 K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팀이 탈락 위기에 있던 종료 직전 상대 골문으로 뛰어가 극적인 헤딩 결승골(2-1승)을 넣으며 아내의 생일을 짜릿하게 축하해준 로맨티스트였다. 그러곤 “내 말에 귀기울여준 당신. 평생 잊을 수 없는 그날의 감격과 기쁨! 그건 언제나 열심히 노력하며 성실하게 사는 당신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란 아내의 고백을 받아든 행복한 사내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이운재에게 밀려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자기가 서야 할 곳에서 승부차기를 막아낸 이운재에게 달려가 펄쩍펄쩍 뛰며 같이 기뻐해주는 것. 독일과의 4강전에서 진 뒤 이운재에게 “수고했다. 잘 싸웠다”고 격려할 수 있는 것.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그를 다시 대표팀에 발탁하라는 여론이 일었지만, 23명 명단에 그는 없었다. 이운재가, 그리고 김용대와 김영광 같은 어린 후배가 어딘가 다쳐야 월드컵에 갈 수 있는 예비선수. 그곳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아내는 울었다. 그도 “월드컵 출전은 열망이자 열정이다. 나도 사람이기에 가능성을 반반으로 보고 기대를 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다시 후배들에게 향했다. 그는 “그라운드에 열정을 쏟아붓고 오거라. 나도 열심히 너희를 응원하겠다”며 아쉬운 마음을 꽁꽁 숨겼다. 경기 전 링거와 진통제 맞고도 출전 2007년 K리그. 김병지(FC서울)는 ‘가을축제’에서 제외됐다. 6강 플레이오프를 손에 쥔 듯했던 FC서울은 K리그 최종전에서 대구에 0-1로 졌다. 비기기만 해도 6강행이 가능했으니, 전반에 먹은 골은 참으로 통탄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골을 허용했을 때 위기감을 느꼈다”고 떠올렸다. 그의 불길한 예감대로 같은 시각 대전 시티즌이 수원 삼성을 꺾으면서 6강 티켓이 대전으로 넘어갔다. 그렇게 시즌이 끝났다. 그러나 이번 시즌 그가 남긴 흔적. 정말 간단치 않은 것들이다. 역대 최다 출장 465경기(총 실점이 463점이니, 그 힘들다는 통산 0점대 실점률이다), 통산 최다 무실점 165경기, 한 시즌 최다 무실점 21경기, 무교체 연속 출전 153경기 신기록. 특히 그는 무교체 연속 출전에 주목했다. 2004년 4월3일부터 3년6개월 동안 그 흔한 감기로 눕는 것조차 없이, 팀 내 골키퍼와 싸움에서 밀리는 것 없이 와야 가능한 일이다. 그 여정만도 경기 시간 1만3860분, 231시간이다. 그래서 프로축구 최고령(38살), ‘노장’이란 말은 그 자신도 깜박깜박 잊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이들은 인터텟 공간에서 “후배들이 불쌍하지도 않냐? 자리 좀 물려주고 길을 터주라”고 ‘악플’을 쏟아낸다. 후배들을 가로막고 있다? 그는 동의하지 않는다. “무교체라는 게 시간이 흐른다고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니지 않느냐. 경기 2~3시간 전까지 링거를 맞기도 했고, 진통제를 맞고 나가는 등 고비도 여러 차례 많았지만, 자기 관리가 있어야 되는 일이다. 팀에서 내가 없어진다고 그것이 후배들의 자리가 바로 되는 게 아니다. 팀이 원하는 만큼 채우지 못하면 팀은 다른 선수를 데려올 것이다. 그래서 난 후배들에게 얘기한다. 경쟁은 내가 아닌 축구 전체를 상대로 해야 한다고. ” 이영진 FC서울 코치는 “그는 진짜 프로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나이가 많다고 운동을 쉬지 않는다. 나이는 중요한 게 아니다. 운동장에서 이기는 사람이 출전하는 거다. 김병지 덕에 올 시즌 14개 팀 중 우리가 최소 실점이었다. 우리 팀에 병지보다 나은 선수가 없으니 그가 나가는 것뿐이다.” 박영수 전 국가대표 골키퍼 코치(현 GK연구소·트레이닝센터 소장)는 “대단한 기록”이라고 했다. “골키퍼도 90분간 4km를 뛰는 운동량을 보인다. 거기에 골에 대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도 많다. 한 번의 실수에서 오는 중압감이 크다. 그걸 이겨야 하고, 감독의 믿음도 있어야 하고, 골키퍼 앞에 있는 수비수들의 신뢰도 있어야 자리를 지킨다. 그게 쉬운 일인가?” 그에겐 아들 3명이 있다. 김태백(8), 김산(6), 그리고 8월에 태어난 늦둥이 김태산. 첫째는 경기 구리 부양초등학교 2학년 축구선수다. 둘째 김산도 한국방송의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슛돌이’ 멤버로 활동했고, 축구선수를 꿈꾼다. 아이들은 공만 50여 개 있는 집에서 액자를 깨기 일쑤고, 아빠가 축구를 못하게 하는 벌칙을 가장 무서워한다. “천둥보다 강하고 불보다 센 아빠” 둘째 산은 “아빠 슛은 선더(천둥)보다 강하고, 파이어(불)보다 세다”고 말할 정도로 아빠를 자랑스러워한다. 김병지는 첫째를 조만간 골키퍼로 전환시켜 대를 이어가게 할 생각이다. 그러곤 훗날 지금 아빠가 매 경기 새롭게 바꿔가는 신기록을 깨주길 바라고 있다. 그런데 그는 나중에 아들이 너무나도 버거워할 500경기 출장을 향해 또 가고 있다. 그는 “‘처음처럼, 그리고 지금처럼’이란 말을 새기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무교체 출장 타이 기록을 세우던 지난 10월8일,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미니홈피에 글을 남겼다. “내 자신을 격려하고 이렇다 할 칭찬 한 번 하지 못했으나, 오늘만큼은 나를 위해 내가 축배의 잔을 올린다. ‘김병지 수고했다.’ 내가 세워놓은 제일 큰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날 지금보다 더 큰 외침으로 다시 한 번 나를 격려하며 감싸안으리라. 넌 진정 축구를 사랑했다고….” 그리고 마지막 그의 글. 혹시 “저 노장, 곧 사라지겠지”라고 생각하는 후배들이 섬뜩한 마음으로 귀기울여야 할 말이다. “(앞으로) 어떤 숫자가 나의 가슴에 그려질지 난 모른다…. 그래서 난 달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