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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

호밀밭을 떠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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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10-25 00:00 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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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가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책, <호밀밭의 파수꾼>과 환상을 깨는 <…을 떠나며>

▣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나이에 걸맞은 책이라는 게 있다. 학교나 교육청 같은 곳에서 나눠주는 권장도서 리스트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다. 그 나이가 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책, 혹은 그때 읽었어야 하는 책을 말하는 것이다.

(사진/ 한겨레 이병학 기자)


십대 말에서 이십대 초쯤 읽으면 가장 깊이 감동하는 작품 중 하나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타인과 나의 지옥 같은 관계, 혈기 방자함과 미숙함에서 나온 어처구니없는 실패담과 자학적 유머, 그리고 순수와 초월에 대한 갈망. 학교에서 네 번째로 퇴학당한 키다리 홀든 콜필드가 추운 뉴욕의 거리를 방황하는 쓸쓸한 이야기는 한마디로 청소년판 <천로역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나 자신을 비롯해 서른 살, 서른다섯 살이 지나서도 이 책을 최고로 꼽는 사람들은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그때 이 책 참 좋아했었지’ 하고 과거시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졸업한 시점은 언제일까.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은 늘 새롭게 읽히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유독 그 시기에만 뼛속 깊이 공감할 수 있는 무언가가 그 책에는 있다.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호밀밭의 파수꾼>은 청년기 독자들뿐만 아니라 유독 테러리스트나 암살범 등 세상을 등진 사람들에게서도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고 한다. 존 레넌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과 케네디를 죽인 하비 오스월드가 이 책을 사랑했다는데, 안 그래도 인터뷰를 일절 하지 않는 은둔자로 유명한 작가로서는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유명세를 더하고 작품을 신화화하기엔 더없이 좋은 일화다.

홀든 콜필드를 떠나보낸 뒤 샐린저는 어떤 작품을 썼나. 국내에 출간된 것은 <아홉 가지 이야기> <목수들아, 대들보를 올려라> <프래니와 주이> 등 세 작품이다. 이 중에서 <아홉 가지 이야기>는 <호밀밭의 파수꾼> 테마의 업그레이드 버전들을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아이가 어른 세계의 음울함을 엿보고는 으스스한 한기에 걸려 집으로 돌아온다는 줄거리인 ‘웃는 남자’, 영민하고 순수한 소녀를 통해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치유되는 어른의 이야기 ‘에스메를 위하여, 사랑 그리고 비참함으로’, 그리고 샐린저가 각별히 사랑했던 최고의 순수주의 캐릭터 시모어 글래스가 등장하는 ‘바나나피시를 위한 완벽한 날’ 등이다.

위의 네 권을 다 읽고 나서, 작가와 작품세계 사이의 거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자신이 있는 독자라면, 샐린저의 연인이던 작가 조이스 메이나드가 쓴 회고록 <호밀밭 파수꾼을 떠나며>도 한번 읽어봄직하다. 이 책은 잘못 읽으면 그야말로 <호밀밭의 파수꾼>뿐만 아니라 작가 샐린저에게 만정이 떨어질 수도 있다. 메이나드는 이 책에서 순수와 젊음에 관한 샐린저의 일관된 관심 이면에 일종의 페도필(소아성욕)과 냉담한 이기주의, 생식(生食)에 대한 집착 등이 있었음을 밝혔다. 메이나드는 총명한 예일대학 1학년 시절인 19살에 53살의 샐린저와 편지를 주고받다가 연인이 되었다. 이후 섹스 트러블 때문에 버림받은 그녀는 샐린저가 그런 식으로 관계를 맺고 버린 어린 여자들이 한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버림받은 ‘롤리타’ 메이나드는 집착과 방황의 지옥 같은 삶을 살다가, 서서히 벗어나 <투 다이 포>와 같은 작품을 쓰면서 독립적인 작가로 거듭났다. 서릿발 같은 원한이 서려 있지만, 단순히 폭로로만 그치지 않는 진솔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내가 <호밀밭의 파수꾼>을 스무 살에 읽은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 나에게 그 책은 분명히 유효했고 감동적이었다. 또한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서 <호밀밭 파수꾼을 떠나며>를 읽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순서가 그 반대라면 좀 곤란하지 않은가. 아무리 샐린저가 인간적으로는 나쁜 남자였다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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